
■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54) 예술작품의 근원, 감상자
창작자 없인 결과물이 없듯
감상자 없인 예술작품 없어
‘문학’이란 사물 출현 위해선
‘읽기’라는 구체적 행위 필요
예술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온전히 관객의 자유서 나와
감상자와 예술가는 동업자
함께 작품을 창조하는 주체
때로 두뇌는 오로지 음악을 재생하는 데 바쳐진 기계인 듯 우리의 내면에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마음에 깊이 파고든 어떤 음악을 쉼 없이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며 감동한다. 또 우리는 마음을 끄는 연주회에 직접 가서 음악이 꽃물처럼 우리 자신을 적시며 물들어 오는 체험을 하고 싶어 한다. 시즌마다 쏟아지는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옛 영화를 찾아 유튜브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새로운 전시회를 챙기면서 미술관 표를 예매하는 일도 설레고 즐겁다. 물론 밤이 깊어갈 때 놀라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책에 몰입하는 일도 우리를 기쁘게 한다. 요컨대 우리의 삶은 늘 예술 곁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예술 감상자’다.
예술은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예술작품, 예술가, 그리고 감상자다. 이 가운데 궁극적으로 예술을 완성시키는 요소를 꼽으라면, 이제 보겠지만 바로 ‘감상자’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예술에 대해 생각할 때 감상자는 제쳐놓고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먼저 떠올리는 듯하다. 예술가에게 찾아오는 특별한 영감,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놀라운 테크닉, 이런 것 말이다.
창작 활동과 그 결과인 작품은 놀라운 것이지만,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 모두 창작자의 위치에 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 반드시 감상자의 위치에는 서야 한다. 예술가든 아니든 간에 모든 사람은 감상자로서 예술과의 만남을 시작한다.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한, 이 ‘감상자’란 누구인가.
예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흘러들 때마다 저수지처럼 그것을 모아온 예술철학은 언뜻언뜻 감상자에 대한 사유를 내비쳐 왔다. 하이데거가 그의 대표적인 예술론 ‘예술작품의 근원’(신상희 역)에서 쓰고 있는 구절과 더불어 감상자에 대한 생각을 시작해 보자. “작품의 창작된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창작하는 자만이 아니라 보존하는 자도 또한 속해 있다.” 여기서 ‘보존하는 자’라 일컬어진 것이 바로 감상자다. 창작된 작품을 존재하게 하는 자는 예술가뿐 아니라 감상자라는 것이다. “작품을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게 함, 바로 이런 태도를 우리는 작품의 보존이라고 말한다. … 창작됨이 없이는, 어떤 작품도 존재할 수 없듯이 … 보존하는 자가 없다면 창작된 것 자체도 존재하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작품이 진정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하는 한, 그 작품은 언제나 보존하는 자와 관련된 채 머무르기 마련이다.”
어떻게 감상자는 예술작품을 진정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탈취하여 ‘작품에 의해 열린 곳’ 속으로 우리 자신을 밀어 넣는 한에서만 … 작품은 하나의 작품으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우리, 즉 감상자를 우리가 익숙해 있던 세계로부터 떼어내어 예술작품을 통해 열린 세계 속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술작품이 하는 일인 동시에 예술작품이 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길이다.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떠나 예술작품이 열어준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쓰고 있는 다음 구절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예전의 그들과는 다르다. 사실 이는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여자들로서, 우리는 예전에는 이런 여자들을 볼 수가 없었다. 마차들 역시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마차이고, 물과 하늘도 그렇다.” 르누아르의 그림이 그것을 본 감상자를 감상자의 세계로부터 탈취하여 그림의 세계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보통 누렸던 일상적인 세계는 사라지고 그림의 세계가 등장한다. 이렇게 르누아르의 그림에 감동한 감상자를 통해 그 그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감상자를 통해 그림은 삶 속에 현존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사르트르의 문학론에서도 우리는 감상자, 즉 ‘독자’가 가지는 중요성을 발견한다. 사르트르에게서 독자는 바로 작품을 완성하는 자다. 사르트르의 문학론에서 독자가 가지는 중대한 지위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정명환 역)의 다음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문학이라는 사물은 야릇한 팽이 같은 것이어서, 오직 움직임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출현(出現)시키기 위해서는 읽기라고 부르는 구체적 행위가 필요하고, 그것은 읽기의 행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이 문장은 문학뿐 아니라 모든 예술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매우 잘 알려주고 있다. 예술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은 금고에 모셔둔 금덩이처럼 도서관 어딘가에 숨은 채 영구히 잠들어 있는 책도 아니고, 보관창고에 아무도 못 보게 감춰둔 그림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엄밀히 말해 예술작품이 아니라고까지 할 수 있으리라, 예술작품은 팽이처럼 움직이는 것이고 움직이는 한에서만 예술작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누가 팽이채를 들고 팽이를 움직이는 자인가. 바로 감상자 또는 독자다.
예를 들어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훌륭하다고 말한다. 삶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가치와 평가는 이 작품이 애초에 가지고 있는 불변하는 속성 같은 것일까? 그렇다기보다 이 작품의 관람이나 독서를 통해 감상자가 창조한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먼 미래의 감상자는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판단과 더불어 작품이 열어주는 세계 역시 달라질 것이다. 한마디로 작품은 감상자와 더불어 팽이처럼 운동한다. 감상자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작품도 사라진다. 감상할 사람이 없다면 작품을 출판할 필요도, 공연할 이유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곧 작품의 소멸을 뜻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감상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창작 행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타인을 위해서만,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감상자란 예술가의 동업자로서 작품을 창조하는 자다.
구체적으로 예술가는 감상자의 무엇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일까. 바로 ‘자유’다. “작가는 독자의 자유에 호소하여 그의 작품의 산출에 협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술가만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 작품을 평가하는 행위는 온전히 감상자의 자유로부터 나온다. 예술가는 결코 강제로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를 감상자로부터 얻어낼 수 없으며, 설령 강제로 얻어낸다고 한들 그것은 완전히 무의미한 평가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가에겐 자신 다음으로 감상자가 가장 두려운 자이리라. 그 자신이 두려운 까닭은 언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창작의 힘이 소진될지 모르는 까닭이고, 감상자가 두려운 까닭은 창작된 작품을 감상자의 자유가 냉혹하게 무(無)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예술작품의 창조가 예술가와 감상자의 자유에 달려 있다면, 즉 예술이 온전히 자유인들에 의해 영위된다면, 예술은 자유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증표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억압적인 사회에서 예술은 독재자나 신에게 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반대로 독재자나 신의 이름으로 파괴된다. 진정한 자유인들만이 예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존재 여부를 좌지우지하는 ‘책임’을 지는 만큼 감상자의 자유는 무거운 자유일 수밖에 없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랑스의 문호 마르셀 프루스트가 1927년까지 14년에 걸쳐 출간한 장편 소설. 집필에는 1922년까지 16년의 시간을 들였다. 특정 냄새의 자극에 따라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프루스트 효과’ 등의 조어로도 알려져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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