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하셨습니까?’ 가난했던 시절 우리네 인사말이다. 선진국이 된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밥은 먹고 다니냐?’ ‘밥심이 최고.’ ‘밥 먹고 합시다!’
친구와 헤어질 때 아이들은 ‘안녕∼’, 어른들은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한다. 하루 세 번 먹는 밥이 그리 중한가. 그런데 이상하다. 밥을 먹자고 거리로 골목으로 로마 병정처럼 진격해서는 밥은 별로 안 먹는다. 짬뽕 짜장면 빵 햄버거를 더 많이 먹는다. 김밥이 인기지만 주식은 아니다. 밥은 밤이 되면 더 홀대를 받는다. 네온이 번득이는 식당가는 왁자지껄 사교의 장이지 밥집이 아니다. 밥은 아주 가끔 ‘이모∼, 공깃밥 하나’로 겨우 목숨을 이어간다. 불경기 타령을 하면서 사람들은 너무 잘 먹고 잘 마신다. 신나게 고기를 뜯던 아재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변명한다. ‘밥은 집에 가서! 여기는 뱃살 늘이기 취미 활동.’
요즘 아재 아줌마들은 발동이 걸리면 건맨이 총을 뽑듯 카드를 내지른다. 여행이 힐링이라면서 다투어 해외로 떠나지만, 넓은 의미로 맛집 순례도 여행이다. 설렘과 포만의 먹거리 트레블. 그러나 너무 자주 이 열차에 오르면 얇은 지갑이 비명을 지른다. 치킨집에서 알게 된 대학생 청년이 그랬다.
고기를 좋아하는 그가 안주 없는 호프잔을 놓고 수심에 잠겼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단다. 군 복무를 마치고 꽤 거금을 모아 나왔는데, 고깃집 도장깨기를 하면서 야금야금 다 까먹었단다. 알바를 두 개나 뛰는데 원룸 집세도 밀렸단다. ‘아무리 고기가 땡긴다고 집세까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더냐?’ 나도 고기를 좋아하는지라 차마 그 말은 못 했다. 그날 이후 청년을 한동안 볼 수가 없었다.
거의 석 달 만에 그를 길거리에서 만났다. 이게 웬일?! 80㎏ 거구가 몰라보게 날씬했다. 표정도 밝았다. 예쁜 애인이 생긴 게 아니라, 고시 공부하는 선배를 보러 절에 갔다가 딴사람이 돼서 하산했다. 무슨 좋은 설법을 들었느냐. 나도 좀 나누어 갖자고 했더니, 뜻밖에도 설법은 밥이었다. 고기는커녕 멸치 한 마리 없는 절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란다. 23년을 살면서 밥상에 고기가 안 보이면 너무도 슬프고 잠이 안 왔는데, 절밥 이후 맨밥을 고추장에 비벼 참기름 한 방울만 쳐도 꿀맛이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 친구가 돈 떨어지니까 정신을 차렸군. 그래 봐야 며칠이나 가겠어?
그림 = 강철수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고기를 한 달에 두 번만 먹는단다. 요번 달은 삼겹살과 양꼬치, 다음 달은 탕수육과 곱창…. 달력에 표시했다가 손꼽아 기다리는 즐거움, 고기의 재발견. 전보다 두 배로 맛있단다. 도장깨기를 안 하니 지출이 대폭 줄어 매일 현찰이 쌓인단다. 난생처음 엄마한테 10만 원이나 송금했단다. 잘 하면 다음 학기에 복학할 것 같단다!
어느 날,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나오는 그를 잡아끌고 치킨집으로 갔다. 그런데 어쭈쭈!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그 좋아하는 고기를 날개 하나만 떼어먹고 더 안 먹었다. 다다음 달 ‘닭백숙데이’가 들었단다. 거의 수도승 레벨이다. 그래도 내가 계속 권하자 청년이 엉뚱한 설법을 풀어 나를 세 번 놀라게 했다.
“선생님, 혹시 치매에 관심 있습니까?”
나는 마시던 호프잔을 내려놓고 멀뚱멀뚱 그의 얼굴을 살폈다.
“어떤 교수님이 그러는데 치매를 예방하는 여러 방법 중에 단연 최고가 고스톱이랍니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그런데 그 고스톱이 말이죠, 바닥을 살펴가며 머리를 써 가면서 쳐야지 그냥 습관적으로 후딱후딱 치면 아무런 효과도 없답니다. 오히려 백해무익하답니다. 사실은 제가 고기를 그렇게 먹지 않았겠습니까. 이집 저집 몰려다니며 그저 습관적으로 등심에 삼겹살에 막창에…, 소주 맥주…. 무슨 깊은 맛인지 몸에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그냥 그냥 고스톱 빨리 치듯 먹었죠. 결국, 뱃살만 잔뜩 늘여놓고 아까운 돈만 훨훨 날아갔죠. 저는 그게 제일 분하고 원통한 거 있죠.”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치킨 조각이 몇 개 남았나 눈으로 세고 있는데, 그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선생님은 자제분을 다 키워 돈 쓸 일이 없을지 몰라도 우리 세대는 엄청 필요하거든요. 혹시…그럴 리 없겠지만, 선생님도 혹시 돈만 깨지는 허망한 습관을 가지고 계시면 탁 잘라 버리세요! 정치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소리만 하지 마시고요.”
청년은 파트타임이 하나 더 있다고 시계를 보면서 자리를 떴다.
청년이 한 달에 딱 하루 쉰다는 날. 치킨집에서 둘이 맥주를 마시다가 내가 슬쩍 ‘대학 나오면 뭘 할거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밥집을 할거란다. K-밥집. 나는 잠시 어안이벙벙했다. K-팝은 많이 들어 봤지만, K-밥은 무슨 밥일까. 그가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홀 서빙만 사람이 하고 식당 설정, 식재료 조달, 주방 모두 AI 로봇이 맡는단다. 선진국에는 이미 일상화돼 오히려 늦었단다. 아마도 자기가 창업할 때쯤이면 AI 로봇이랑 점포 계약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단다. 듣고 보니 뜬구름 잡기가 전혀 아니다. 서빙만은 사람을 고용하겠다는 사려 깊은 젊은 ‘싸부’의 K-밥! 진실로 성공을 빌어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