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국제부장

미국·중국 AI 경쟁 가열 속
유럽은 혁신 5개년 계획 발표
AI 투자 확대와 규제 일원화

2년 전부터 준비해온 결과물
번영이 곧 존재 이유라는 EU
與野 반도체법 신속 처리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다음 날인 1월 21일 첫 기자회견에서 미국 내 인공지능(AI) 인프라에 5000억 달러를 투자하는 스타게이트 계획을 발표했다. 오픈AI와 오라클, 소프트뱅크가 자금을 투입해 미국의 AI 주도권 유지와 경쟁국과의 격차 확대 등을 추진하는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일인 1월 20일에는 중국 AI 스타트업인 딥시크(DeepSeek)가 오픈AI의 챗GPT 능력에 버금가는 저가형 추론 AI 모델인 R1을 내놓아 세계에 충격을 줬다.

미국과 중국의 AI 경쟁 속에 눈길을 끄는 것은 유럽 정치권의 움직임이다. 유럽연합(EU)의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1월 2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경쟁력 강화 5개년 계획인 ‘경쟁력 나침반’(Competitiveness Compass)을 발표했다. 혁신 격차 해소, 탈탄소화, 공급망 안보 등 세 가지를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계획이다. 특히, 혁신 격차 해소를 위해 AI에 대한 투자 확대와 규제 축소를 제시했다.

이에 따라 주요 산업 내 AI 기술 확산을 위해 ‘AI 기가팩토리’ 및 ‘AI 적용’ 이니셔티브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집행위는 지난해 12월 15억 유로를 투자해 유럽 전역에 AI 기가팩토리 7개소를 구축하기로 한 상태다. AI 기가팩토리를 통해 AI 모델 훈련에 필요한 시설과 데이터를 제공해 기업과 학계 연구를 돕는다는 방침이다. 이와 함께 AI 적용 이니셔티브를 활용해 현재 13.5%인 AI 활용 기업의 비중을 더욱 확대한다는 계획도 있다. 규제도 일원화한다. 현재 EU 27개 회원국에서 각각 적용되는 법적 체제를 단순화해 하나로 하는 ‘28번째 법률 체제’(28th legal regime)를 마련해 노동법·파산법·세법 등 기업 관련 규정을 일원화하는 것이다. 집행위는 이러한 규제 간소화로 기업의 행정 부담이 25%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미·중 중심으로 진행되는 AI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 EU도 신발 끈을 동여매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경쟁력 나침반은 미국과 중국 움직임에 놀란 EU가 갑자기 발표한 것 같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유럽 정치권이 준비해온 결과물이다. 집행위는 2년 전에 이탈리아 총리와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에게 유럽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 수립을 요청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1년여 연구 끝에 지난해 9월 9일 ‘유럽 경쟁력의 미래’(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보고서를 내놓았다. 경쟁력 나침반은 이러한 유럽 경쟁력 미래 보고서를 바탕으로 마련됐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는 저성장에 빠진 유럽 경제의 원인을 디지털 경제에 뒤처진 때문으로 지목하고 혁신을 가장 먼저 강조했다. 1990년대 말 미국의 생산성을 거의 따라잡았지만 이후 디지털 경제에서 밀리면서 생산성 격차가 커져 저성장에 빠졌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AI 스타트업 자금의 61%는 미국 기업에, 17%는 중국 기업에 유입되는 반면, 유럽 기업으로 들어오는 자금 비중은 6%에 불과하다. 또, 세계 상위 50개 기술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린 유럽 기업은 4개에 그쳤다. 보고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국,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연간 7500억∼8000억 유로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EU 국내총생산(GDP)의 4.4∼4.7%에 달하는 규모다.

유럽 정치권이 각국 이해관계와 좌우 정파에 따라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도 유럽의 미래를 위한 방안 마련에 오랜 기간 머리를 맞대어왔음을 보여준다. 유럽 정치권이 AI 개발을 지원하고 나선 것은 보고서의 지적대로 이것이 ‘존재론적 도전’(Existential Challenge)이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서문에 ‘EU의 기본 가치는 번영과 평등, 자유, 평화, 민주주의다. 만약 유럽이 이러한 기본 권리를 국민에게 제공할 수 없다면 유럽의 존재 이유는 사라질 것이다’고 지적했다. AI 시대를 맞아 각국 정치권이 국가의 생존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지금, ‘주 52시간 근로 제한 예외’ 문제에 얽매여 반도체특별법 처리를 위한 의견 접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정당들은 과연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김석 국제부장
김석 국제부장
김석

김석 기자

문화일보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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