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의료파행 1년 넘어 시계 제로
분명해진 필수·지역의료 위기
의료계 뉴노멀 반갑지만 한계

의대 신입생들의 학습권 보장
내년 증원 숙의로 의료정상화
신뢰 쌓으며 옳은 해법 찾아야


정부가 의대 2000명 증원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의정 갈등이 1년을 넘어 다음 달 신입생들이 입학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다. 지난해 2월 20일 전공의 집단이탈 이후 줄곧 정부는 몰아붙이고 전공의는 무응답으로 일관하며 변변한 대화 한 번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오랜 불신 위에 양측 모두 시간은 자기편이라 믿고 버티면 서로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던 듯하다.

하지만 결국 모두 패자가 됐다. 정부는 의사 부족에 따른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선취하고도 2000명이라는 무리한 증원으로 이 사태를 일으켰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2000명이 주술적 선택이었다는 소문까지 들릴 정도로 타당성도 훼손됐다. 의료개혁에 대한 여론의 높은 지지를 업고도 파업 전공의와 학교를 떠난 의대생에게 ‘일단 강공 후 슬그머니 양보’를 반복하며 원칙도 저버리고 실익도 거두지 못했다. 전공의와 의대생 역시 버티기만 할 뿐 의견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얻은 거라곤 국민의 지탄뿐이다. 남은 의료진은 번아웃에 시달리고 학술 연구는 대폭 줄었다. 병원은 경영에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지역 병원들의 어려움은 말도 못한다.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환자다. 최근, 지난해 2∼7월 전국 의료기관에서 ‘초과 사망자’가 3136명 발생했다는 자료가 나왔다. 의료 파업으로 수술이나 치료가 늦어져 평시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빅5 상급 병원 암환자는 예약에만 5개월 이상 걸린다고 한다. 병은 삶의 기본값인데, 다들 아플까 걱정이다.

그래도 의료체계의 뉴노멀이 생긴 것은 다행이다. 전공의가 떠난 상급 종합병원은 중증 희귀 환자 중심으로 구조 전환 중이고, 대학병원은 경증 환자 진료를 줄이며 체질 개선에 나섰다. 응급실 경증 환자 비율은 대폭 줄었고, 진료지원(PA) 간호사의 법적 지위도 마련됐다. 하지만 아무리 정부가 의료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해도 의료 파행에 부닥쳐 일정 부분 ‘급한 곳 먼저’ 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개혁 추진이 시급하다. 정부 정책이 옳다 해도 의사라는 당사자 없이 홀로 나아갈 수도 없다.

아이러니하게 의정 갈등이 남긴 긍정적 효과 중 하나는 1만 명에 이르는 전공의가 한꺼번에 빠지면서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 위기라는 우리 의료 체계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덕분에 의료개혁의 핵심 의제가 뾰족해졌다. 필수 의료 분야 수가 조정, 의료 사건에 대한 형사소송 위험을 낮추는 조치 등의 사안은 여론의 적극적 지지를 받게 됐다. 주 100시간 가까이 근무하는 전공의가 상급 종합병원 의사의 40%를 차지하는 기형적 구조도 이제 불가능하게 됐다. 전공의들이 현장으로 복귀한다 해도 이전 시스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곧 신입생들이 들어온다.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이라는 최대 현안도 기다리고 있다. 5월 2026학년도 대학 입시요강이 공표되려면 4월 입시요강, 3월 대학 정원 확정을 위해 2월에 의대 정원을 정해야 한다. 양측이 내년 의대 정원에 합의한다면 의료 정상화는 급물살을 탈 수 있다. 정부는 원점 재검토 방침을 밝혔다. 전공의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무엇보다 1학년 신입생에게 피해가 없어야 한다. 일부 대학에선 이미 오리엔테이션에서 휴학을 강요하는 움직임이 있다. 학교는 학습권을 보장하고 교육의 질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증원으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많은 ‘합리적인 의심’이 풀린다면 의대 증원을 둘러싼 갈등의 한 매듭도 풀릴 것이다.

오랜 불신 위에 지난 1년간 불신의 탑은 더 높아졌다. 복원할 신뢰가 없으니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갈등 해결의 제1 원칙은 나와 그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깨는 것이다. 최소한 서로를 괴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질병과 의료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맞닿은 공공적 문제로, 한쪽이 완전히 질 때까지 싸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번엔 최선의 답을 함께 찾아내주길 바란다. 요즘 한창 상한가를 치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골든아워’에서 주인공은 이런 말을 했다.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사람 못 살려.” 골든아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최현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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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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