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시장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오픈AI의 챗GPT 출시 이후 중국발 딥시크 쇼크가 나오기까지 숨 가쁘게 바뀌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AI) 때문이다. 국가 경제와 안보의 근간이 된 AI와 반도체는 이제 미·중 기술패권 전쟁에서 양보할 수 없는 분야다.
한때 세계 반도체 1위였던 인텔은 이제 시가총액 기준 14위로 떨어졌다. SK하이닉스와 같은 1000억 달러 수준이다. 인텔의 CPU는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영국 저전력 Arm의 CPU에 데이터센터에서 밀려나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지난해 Arm과 보완적인 영국의 AI 반도체 스타트업 그래프코어를 헐값에 인수했다. 또한, Arm 기반의 저전력 고성능 CPU와 컴퓨팅 솔루션을 개발한 스타트업 암페어컴퓨팅을 65억 달러 가치로 인수 협상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후원을 받는 스타게이트를 통해 오라클·오픈AI와 함께 새로운 AI 인프라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속도가 빠른 혁신 자본을 지렛대로 활용해 전 세계 일류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는 소프트뱅크는 변혁의 시대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인텔 CPU를 생산하던 자체 반도체 라인은 이제 계륵이 됐다. 근성이 없는 경영진이 구조적 변화의 기회를 잇달아 놓친 결과다. 급기야 지난주 블룸버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TSMC에 인텔 반도체 라인을 살리기 위해 이 회사의 대주주로 지분을 인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만약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한다면 삼성전자에는 불리한 구도가 된다.
한때 2위였던 삼성전자 위상은 현재 세계 5위로 떨어졌다. 빅테크 기업들의 주문형 AI 가속기 반도체 시장을 공략한 브로드컴이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겨 세계 2위가 됐다. 언론은 브로드컴의 인텔 CPU 설계부문 인수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 브로드컴 CEO 혹탄은 지난 18년간 인수·합병(M&A)을 통해 AI 시대에 필요한 반도체와 통신, 소프트웨어 기술을 축적해온 전략가다. 트럼프 1기 시절, 싱가포르 국적의 브로드컴은 퀄컴을 인수하려다 좌절됐다. 이후 회사를 미국 국적으로 전환한 후, 본사도 실리콘밸리 한가운데인 스탠퍼드 연구공원으로 옮겼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으로 촉발된 중국의 반도체 자강 정책과 미국의 GPU·HBM3 같은 전략 반도체의 대중 수출 금지도 우리 기업이 당면한 위기 요인이다. ‘중국의 엔비디아’를 추구하는 화웨이·호라이즌 로보틱스 같은 팹리스 기업들이 ‘중국의 TSMC’ 격인 SMIC에 일감을 몰아주고, 중국의 휴대전화·가전·자동차 회사들이 한국산 메모리를 자국산으로 대체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는 산업의 변곡점에서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한 전략적 투자를 할 수 있는 기업 구조와 문화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반면 엔비디아·브로드컴·TSMC의 경영진들은 AI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선제적으로 전략적 투자를 했다. 국가의 흥망을 가르는 첨예한 글로벌 기술 경쟁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문치주의 정치가 만들어낸 규제와 실효성 없는 정책도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했다. 반도체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왕도는 따로 없다. 기업이나 정부나 모두 야성을 회복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