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철환의 음악동네 -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시청자를 사로잡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홍보 문구부터 달라야 한다. ‘악인(惡人)이 되지 않기 위해 악인(樂人)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영화 ‘악인전’(2019)이 프로그램 제목에 영감을 줬을 거다. 지금 보니 영화의 주인공 마동석(조폭), 김무열(경찰)이 ‘범죄도시 4’에선 정반대의 역할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팔색조 연기파의 변신은 무죄이자 책무다.
예능 ‘악인전’(2020)의 주인공은 송창식, 송가인이다. 알려진 대로 두 사람은 클래식과 국악에서 대중가요로 판을 바꾸었다. 송창식의 서울예고 입학 동기 중에 지휘자 금난새가 있는데 일반인 특히 청소년들에게 클래식을 친절하게 소개한 분으로 유명하다. 만약 송창식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면 어떤 모습일까. 한밤중에 도포 자락 휘날리며 체력 연마하는 장면을 볼진대 예사롭지 않은 마에스트로가 탄생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결과적으로 쎄시봉은 가요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준 대신 클래식의 명인 하나를 빼앗은 건지도 모른다.
음악 그 자체의 음악을 절대음악이라고 한다. 어릴 때 클래식을 감상하거나 배워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 음악 속에 깃든 창작자의 비밀을 감히 누설할 수 없다. 사적인 모임에서 누가 나를 음악평론가라고 소개하길래 황급히 바로잡은 적도 있다. “저는 노래채집가입니다. 음악을 비평하는 게 아니라 노래가 하는 말을 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부산에 클래식 전용 극장(부산 콘서트홀)이 생기면서 초대 예술 감독으로 지휘자 정명훈을 초빙했다. 6월 개관 첫 공연으로 그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선정했다. 이 곡은 최후이자 최초의 기록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생전에 완성한 교향곡 중 최후이고 사람의 목소리가 담긴 첫 합창곡이다. 물론 베토벤 자신은 이런 제목(합창)을 붙인 적이 없다. 4명의 독창과 합창이 나오는 4악장 때문에 자연스럽게 ‘합창’이란 별칭을 가지게 됐다. 가사는 그가 흠모하던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에서 가져왔다.
1824년 5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됐을 당시 베토벤은 완전히 청력을 잃은 상태여서 다른 지휘자(미하엘 움라우프)가 함께 무대에 섰다. 연주가 끝나고 열광적인 환호가 쏟아졌지만 알아채지 못했고 알토 가수가 베토벤을 객석으로 향하도록 유도해서야 관객의 박수에 비로소 답례했다. 아마도 그 순간은 그의 음악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한쪽만 바라보며 집단으로 분노를 발산하는 광경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합창을 시작할 때 바리톤이 외치는 함성을 불러오고 싶다. ‘오 친구여 이런 소리가 아닙니다. 더 즐겁고 희망찬 기쁨의 노래를 부릅시다.’ 환희의 송가는 음악(그대)의 힘을 웅변한다. ‘그대의 신비로운 매력은 관습이 갈라놓은 것들을 다시 연결하고 모든 인간은 그대의 아늑한 날개 아래 형제가 된다.’

위인들은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지 않았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남기고 넘겼는가. 고통과 분노의 시간을 슬기롭게 넘겼기에(극복) 오래도록 좋은 것(즐거움과 깨달음)을 남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베토벤을 악성(樂聖)이라고 부른다. 악인(樂人) 중의 성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승자에 환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성자를 향해 고개 숙인다.
작가·프로듀서·노래 채집가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