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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o - ‘성역화’ 된 근로기준법

“근기법 근간 흔들린다” 논리에
반도체법 ‘52시간 예외’ 표류

‘근로계약’ 관계만 대상에 한정
프리랜서 법적 보호 사각지대

노사정 갈등에 ‘노동 사법화’
법원서 통상임금 등 기준 정해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72년, 노동자 전태일이 서울 중구 청계천로 평화시장에서 근기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지 55년이 지났다. 그 사이 한국 노동시장의 중심은 공장에서 사무실, 심지어 집으로 확장했지만 법의 기본 골격은 아직까지 ‘공장법’ 형태다. 과거 공장 시대는 근로자들이 생산 라인에 일시에 투입돼 정해진 시간에 교대해야 효율을 담보할 수 있었고, 법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근로시간을 엄격히 규정했다. 이후 산업 다변화 등 시대가 변하면서 정부가 유연화를 골자로 노동개혁에 나서기도 했지만, 강성 노조 등은 법을 ‘성역’으로 여기며 맞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 중 근로시간 산정을 주간으로 하는 경우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노동개혁이 표류하면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업장에서 노동을 제공하지만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프리랜서, 플랫폼 근로자의 존재도 고(故) 오요안나의 사건을 계기로 부각됐다. 이들 대다수는 업무 지시·통제 등은 회사 소속 근로자와 큰 차이가 없지만,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가장 보호가 필요한 5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자가 근기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도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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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시대 넘지 못하는 근기법, 발목 잡힌 산업 경쟁력 = 지난해 말부터 산업계와 노동계의 가장 큰 화두였던 반도체특별법을 두고 노동계와 민주당은 특별법 처리 과정에서 “근기법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논리를 폈고, 근로시간 부문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노동계와 같은 입장을 취하며 법 처리가 무산됐다. 해당 법은 반도체 업종의 연구·개발(R&D) 종사자가 대상이지만, ‘성역’이 된 근기법 체제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근로시간 유연화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노동계는 현행 근기법 체제를 유지하면서 기존 탄력·선택·유연근로제 등의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며, 근로자 건강권 침해를 강조한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 등은 유연근로제 등 절차를 현장에 적용하는 데 절차적 한계가 큰 만큼 과거 산업화 시대 교대 근무를 토대로 만들어진 근기법 체제에 변화를 요구한다. 이달 초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김태정 삼성글로벌리서치 상무는 “탄력·선택근로제는 11시간 연속 휴무 조항으로 인해 활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갑작스러운 오류가 발생해도 대응하기 어렵고, 연구자 선택에 따라 3일간 집중해 근로하는 자율성은 현 제도에선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노동계는 ‘주 52시간제 수정 = 건강권 침해’란 등식을 내세우지만, 업계에선 특정 기간 집중 연구가 필요한 R&D 등에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과거 근기법은 획일성과 보편성을 기반으로 했지만 현대사회는 다양성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업무 형태가 확산되고 있다”며 “근로자 스스로 근로시간을 설계할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해야 현대 지식사회 노동의 본질에 가깝고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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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다른 근로자, 프리랜서는 보호 사각지대 = 근기법은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근로자는 사용자와 ‘근로계약’을 맺고 노동을 제공하는 데 반해 프리랜서와 플랫폼 종사자는 사용자와 근기법이 아닌 민법상 계약관계를 맺고 노동을 제공한다. 이들이 근로자로 보이는 이유는 회사의 지시·관리·통제 아래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프리랜서의 어원은 ‘자유’(Free)와 ‘창병’(Lancer)으로, 중세시대 용병에서 유래했지만 한국 내 노동시장에서는 ‘종속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

산업 다양화 속에서 프리랜서와 플랫폼 종사자 수가 늘어나면서 갈등도 표면화되고 있다. 고 오요안나 사건에서 쟁점은 ‘직장 내 괴롭힘’이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기법 76조의 2)’이 시행됐지만, 법에서 금하는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한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의 대상은 근로자로 제한됐다. 변화된 추세에 맞춰 국제노동기구(ILO)는 2019년 채택한 폭력과 괴롭힘 협약(제190호) 적용 대상을 ‘국내법과 관행이 정의하는 근로자뿐 아니라 계약 지위와 관계없이 일하는 사람·인턴·견습 등 훈련 중인 사람, 고용이 종료된 노무 제공자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23년부터 특수형태근로종사자나 플랫폼 종사자들도 산재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게 하는 등 보호 범위를 넓히고 있다. 다만 민법상 계약 관계 틀을 유지하면서 근로자성을 어느 정도 확대할지는 풀어야 할 숙제다.

◇지체된 개혁으로 나타난 ‘노동의 사법화’ = 노사정이 근로시간과 임금 등 현안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현장 갈등은 법원으로 향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대법원이 근로시간과 통상임금 등에 새로운 기준을 내놓고 정부는 지침을 만드는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2023년 말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주52시간제 위반 여부를 ‘일 단위’가 아니라 ‘주 단위’로 판단하며 ‘주 40시간 초과 근로시간 기준’만 인정했다. 앞서 고용노동부와 법원은 근기법에 따라 주 40시간 초과 근로시간이 12시간 연장 근로시간을 넘는 경우 또는 하루 8시간 초과 근로시간이 12시간을 넘는 경우 등을 주 52시간 근로제 위반으로 해석하던 것에서 범위를 좁힌 것이다. 대법원이 현행법과 제도보다 빠르게 변화할 경우 이에 대비해야 하는 현장의 혼란이 불가피하다.

법은 그대로인데, 대법원 입장이 바뀌기도 한다. 지난해 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회사 재직자에게만 지급하는 조건부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2013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통상임금의 기준이 돼왔던 정기성·일률성·고정성 가운데, 고정성은 법령에 근거가 없다며 폐지하고 ‘근로의 대가로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하도록 정해진 임금은 통상임금’이라는 새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노동계 안팎에선 노동시장 현실을 아는 노사정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법원에서 결정되는 구조에 대한 비판이 크다. 노동계 관계자는 “근기법은 노동시장 주체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반영돼 현실에 맞게 변해야 하는데, 최근에는 사법부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며 “노사정이 근로시간·임금 등 다양한 사안이 복합된 노동시장의 특성을 고려해 입법 주체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철순 기자 csjeong110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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