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통합 정치 영웅 사라지고 포퓰리즘 무장 ‘슈퍼악당’ 질주 탄핵정국도 ‘惡政 경쟁장’ 변질
두 진영 재판승복은 패배로 인식 尹·李 3월 빅뱅까지 대치 가열 국민이 성찰, 정치 퇴행 막아야
“그를 지지한 이유가 바로 그 인성(character) 때문이었다. 강한 압박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성 덕분이었다.” 지난 1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행정부 이양을 앞둔 조 바이든 대통령이 행한 조사(弔詞)였다. 고인의 업적을 칭송하기 마련이지만, 바이든은 “카터가 평생 지녔던 인성, 인성, 인성”에 대해 헌사를 했다. “그는 정당하게 행동했고, 자비를 사랑했으며, 언제나 겸손했다.” 카터의 재임 시절의 업적에 대해선 비판이 많지만, 인간적 면모에 대한 세평에는 큰 편차가 없다. 바이든이 당시 장례식장에 앉아 있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을 거명하진 않았으나 모두가 속뜻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열흘 뒤 트럼프는 취임 첫날 46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며 더 강해진 트럼피즘을 세계로 발신했다.
“정치라는 권력이 작동하는 세상에서는 뛰어난 인물이나 순수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맞는 말이다. “오히려 교활한 인간이 결정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기문학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전후에 악명 높은 정치인 조제프 푸셰의 전기를 내놓으면서 한 말이다. 수도회 사제였다가 국민공회 대의원으로 변신해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고,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동참해 2인자가 됐던 인물. 온갖 권모술수로 끊임없이 권력을 탐했던 처세 달인의 평전을 쓴 이유를 츠바이크는 이렇게 설명했다. “영웅 위인전은 용기와 정신을 고양하는 힘이 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그럴 뿐이다. 정치는 정치인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직업적인 음모가, 사기꾼, 도박꾼에게 조종되고 농락당하고 있다. 그 위험한 힘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책의 원제는 ‘어느 정치가의 초상’인데, 국내 번역서의 제목이 더 와 닿는다. ‘나쁜 정치가는 어떻게 세상을 망치는가’.
선행과 악행이 차별돼야 문명사회이고, 선정(善政)과 악정(惡政)이 구분돼야 온전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정치가 발전했다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더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전통적 영웅의 시대가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A O 스콧은 트럼프가 재당선되자 ‘이제 슈퍼 악당이 영웅’이라고 했다. 대중문화에 비유하면서 “세계 지배의 야욕과 예측 불가에다, 규범·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페르소나”라고 했다. 그의 저항은 결함이 아니라 미덕이다. 불공정에 대항한 것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복수와 사회적 사명을 구분하지 않고, 규칙을 바꿔도 공정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도 회색 지대에 산다. 강권주의 통치 성향에다 대중을 포획하는 기술을 고도화한 포퓰리스트들이 유권자 선택을 받아 질주하는 시대, 그게 정치 현실이다.
이 땅에서도 통합적 국가 리더의 관념이 실종된 진영 간 정치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부터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찬반까지, 누가 이 사태를 초래한 진짜 원흉인지를 놓고 가리는 ‘악당 대결장’ 같아 보인다. 국회에서, 광장에서, 온라인에서, 심지어 대학가에서 상대의 악인화에 독기를 뿜어내고 있다. 비상계엄 선포가 위헌·위법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재명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권력 횡포가 헌정사에 유례없는 수준의 악행이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결국, 어느 쪽이 더 ‘나쁜 정치’였느냐다. 누가 더 선정을 폈느냐는 없다.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조차 없다. 권력자의 편향된 인식이 불만 해소처를 찾는 대중과 결합돼 동일시되고, 정당하다고 믿어서다. 지지층의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시비를 가리는 심판정마저 승부의 논리로 덮어버린다. 어떤 결정이 나오든 정치적으론 승복하는 자가 패배자다.
두 사람의 정치 행로가 걸린 3월 빅뱅이 예고됐다. 이 대표가 ‘대선 당선 경우에는 재판 중단이 다수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공직선거법 2·3심 판결에 상관없이 대선에 직행하겠다는 사실상의 불복 신호다. 나쁜 정치 다툼은 더 거세질 것이다. 막아설 사람들이 있다고 믿어도 되는가. 양 극단에 휩쓸리지 않고, 나라를 맡겨서는 안 되는 사람을 성찰하는 다수가 있는가. 단언컨대, 우리에게 슈퍼 악당은 필요 없다. 권력을 준 국민이 퇴행을 막는 책임도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