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푸틴 통화 후 트럼프 친러 선회
젤렌스키를 독재자 비난하고
안보리에선 러 면죄부 결의안

푸틴식 도발 中·北이 뒤따르면
대한민국이 제2 우크라 우려
동맹과 국론통일 더 중시해야


‘스마트폰을 든 21세기 윈스턴 처칠’로도 비유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한 달 만에 상갓집 개(喪家之狗) 처지가 되는 기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90분 전화 밀담을 나눈 뒤부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러 종전 협상을 시작하겠다면서 “우크라이나가 침공했다”고 말했고, 젤렌스키를 향해선 독재자라는 표현을 썼다. 러시아가 시대착오적 ‘탈(脫)나치화’를 내세우며 3년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도 푸틴식 허위정보를 유포한다.

‘트럼프·푸틴 통화’ 이후 10여 일은 세계 질서가 스트롱맨 중심의 권위주의로 재편되는 시기라 할 만큼 긴박했다. 그 통화 당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브뤼셀의 나토(NATO) 본부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비현실적이고 실지(失地) 회복도 허황한 목표”라고 했다. 이틀 후 J D 밴스 부통령은 뮌헨안보회의에서 유럽의 반(反)극우 정서를 비판하며 “미국이 그런 유럽을 방어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비꼬았다. 유엔에선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미국은 22일 유엔총회에 제출된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신속한 종전’만이 강조된 결의안을 중·러와 손잡고 통과시켰다.

100여 년 전 미국 저널리스트 존 리드는 러시아혁명 전후를 기록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펴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 후 20세기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열흘간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트럼프·푸틴 통화’ 후 10여 일간 마가(MAGA) 이념으로 뭉친 미국판 볼셰비키들이 벌인 자유주의 세계 질서 파괴 행태가 그들과 빼닮았다.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원할 때까지 지원한다”며 자유주의 연대를 독려한 조 바이든 전 대통령 때의 나라가 더는 아니다. 왕을 자임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그를 맹신하고 떠받드는 가신들이 미국을 반(半)권위주의 국가로 퇴행시키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사실상 면죄부를 받게 되면서 이제 러·우 전쟁 파장은 유럽과 아시아로 전이될 가능성이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앞마당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푸틴 대통령의 주변국 도발을 용인한다면 발트해 및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제2의 우크라이나가 될 것이다. 푸틴 대통령과 ‘무제한 파트너십’을 결의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대만 침공을 밀어붙일 논리가 생겼다. 시 주석이 2017년 마러라고 미·중 정상회담 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해 파문이 일었던 적이 있다. 한반도도 안정권은 아니다. 대만 침공을 전후해 북한 김정은을 부추길 수 있다.

문제는 3월 초중순에 나올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결정 이후다. 헌재가 기각 결정을 내리면 윤석열 대통령 복귀로 정상외교가 곧바로 재개되겠지만, 인용되면 2개월 이내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며 국제질서 재편에 대한 대응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집권할 경우 민주당 내 반미·친북 세력, 나아가 조국혁신당의 반(反)동맹론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가뜩이나 유동적인 한미관계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가 반미 시위 소재로 악용될 때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 구상만 했었던 주한미군 철수 및 동맹 파기를 결정해버릴 수 있다.

구소련 붕괴 후 독립한 우크라이나가 비슷한 시기 체제 전환을 한 체코나 헝가리, 폴란드와는 달리, 유럽연합(EU)과 나토에 가입하지 못한 것은 친러·반러 세력 간 정쟁과 부정부패 탓이 크다. 내부 분열 탓에 역사적 기회를 놓치고 굴욕을 당하는 우크라이나는 세계 질서 격변기에 대통령 탄핵 사태로 나라가 두 쪽 난 우리에게 반면교사다. 우크라이나는 인구나 경제력 면에서 러시아보다 작고 가난하며 동맹도 없다. 국민이 똘똘 뭉쳐 싸웠지만, 미·러 야합으로 하루아침에 패전국 처지가 됐다. 우크라이나를 보며, 동맹·자강·단합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대한민국이 아시아판 우크라이나가 되지 않으려면 정파를 초월해 한미동맹부터 잘 지키며 위기의 시대를 견뎌야 한다.

이미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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