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M 인터뷰
디지털 혁명 속 철학잡지 펴낸 이 한 구 타우마제인 재단 이사장
포퓰리즘·팬덤정치로 뻗어나가
상대를 절멸시키면 공멸의 길뿐
합리적이고 한차원 높은 단계서
전체를 볼 인문·철학 꼭 필요해
젊은 세대의 철학적 사고를 위해
AI·한류 등 관심거리 주제 선정
“비판적 사고를 하지 않는 이 시대에 철학을 다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분초를 다투는 사회, 디지털 혁명을 거듭하는 시대에 자리를 잃어가는 철학. 그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끝없이 강조하는 철학자가 있다. 30여 년간 대학 강단에서 철학 연구에 앞장서며 대한민국학술원 상을 비롯해 수많은 학술상을 받고 학교를 떠나서는 재단 ‘타우마제인’을 설립한 이한구 이사장의 이야기다. ‘경이로움’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따온 ‘타우마제인’(Thaumazein)은 이 이사장의 지향점이다. 주어진 방식대로 생각하고 정해진 답을 학습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의문과 근원적인 고민 속에서만 나오는 그 경이로움. 정치적·정서적 양극화 속에서 생각하는 법을 잊은 대중에게 이 감정은 삶의 의미와 감정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희망과 같다. 이 때문에 이 이사장은 재단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철학적 사고하기’를 전파하고 있다. 인문·철학을 주제로 한 강연과 철학 캠프 운영, 인문·철학 분야 학회 지원, 그리고 그중에서도 대중철학잡지 ‘타우마제인’ 출간은 그가 공들이는 활동 중 하나다. 비록 우리 사회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최근 ‘타우마제인’ 5호를 출간한 그를 서울 용산구 타우마제인 연구소에서 만났다.
―철학자로서 최근 우리 사회를 진단한다면.
“이른바 ‘정보의 호수’에 떠내려가고 있다. 지금의 사회 현상은 굉장히 빨리 일어나고 또 빨리 사라지는데 인문·철학과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안에서 나의 정체성이나 삶의 목표, 의미 같은 것들이 많이 훼손되고 소외되고 있다. 매체 환경 자체도 쇼츠 위주로 형성되고 있는데 점점 1분, 30초조차 견디지 못하니 깊고 넓게또 길게 사고하는 사고력 자체는 자꾸 퇴화해 버린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혹은 전체적인 측면에서 인류 문명을 창조해가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하다고 보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현대 사회는 정서적 양극화가 굉장히 심각하다.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상대방이 싫다’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지금의 포퓰리즘이나 팬덤 정치와 같은 현상들도 이런 정서적 양극화의 한 양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런 상태에서 문제 해결이라는 것은 상대를 절멸시켜 버리는 길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발전은 없고 서로가 공멸할 때까지 끝없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제 한 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서로가 공존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합리적이고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전체를 볼 수 있고 또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인문·철학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다만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반전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가.
“사실 그간 인문·철학은 정말 밑바닥까지 소외됐었다. ‘문송합니다’(문과라 죄송합니다) 같은 표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인문 분야 자체가 저평가됐는데 그중에서도 철학은 소외 현상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극한까지 가다 보니 이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근래 대중철학서의 인기도 그렇고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철학에 관한 관심이 조금 늘어나는 느낌이 든다. 지난 겨울방학 때 진행한 철학 캠프도 마찬가지다. 재단에서는 인원이 다 모일지 의문이 들었는데 50명이 순식간에 차기도 했다. 이제 이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방향성 자체가 막 어지러운 시기에 인문·철학의 그 역할이 반드시 요청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계엄이나 탄핵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라는 정답을 안내하는 게 아니라 특정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보여주고 다른 사안에서도 본인이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철학은 지식으로 무언가 하려는 것보다는 사고방식 그 자체에 있다.”
―다만 철학이라고 하면 일반 대중은 시작하기 전부터 겁을 먹기도 한다.
“강단 철학과 생활 철학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나도 50대 후반에 들어서야 생활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 전까지는 대학 강단에서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대학에서 철학 전공을 하면서 현실과는 거의 뭐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런 학문적인 것만 했다. 특히 인식론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과 별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래서 나도 다른 철학자들과 같이 생활 철학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고독이나 외로움같이 우리가 실제 생활 속에서 느끼는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하게 됐다. 철학을 전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철학 이론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겠지만 철학을 접하는 입장에서는 칸트, 니체를 꼭 알 필요가 없다.”
―인문대 축소 문제 또한 학계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그게 아주 큰 문제다. 철학에 관한 관심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사립대에서는 설립 취지나 경영진의 방향성 등으로 과를 통합하는 것이 불가피할지라도 적어도 지금 국립대에서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10년, 20년 혹은 한 세대 다음을 보면서 투자해야 하는 교육인데 인문 교육의 기회를 축소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 실용주의에 압도된 것 같다. 과거에는 동양은 정신문화, 서구는 물질문화라고 여겼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우리가 더 물질적으로 변했다. 이를테면 미국의 경우에는 인문 학술 분야를 국가적으로 키웠다. 해외의 유명 연구자까지 전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기초 학문 분야를 키웠는데 그 결과 지금은 철학 같은 경우에도 유럽이 아닌 미국이 선도 국가가 됐다.”
―앞으로 다뤄야 할 사회적 현안은 무엇인가.
“타우마제인의 다음 호 주제이기도 한 ‘리더십’이다. 전 세계적으로 특히 정치적 리더십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리더십과 관련해 철학 분야에서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는 책을 통해 우중 정치와 같은 포퓰리즘적인 민주 정치를 비판하면서 독재 체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누가 국가를 이끌어야 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철인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그 철인, 즉 철학자의 리더십에 대해 플라톤은 통찰력과 도덕성을 중요한 요소로 내세웠다. 플라톤이 말하는 리더십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통용되지는 못하지만, 그가 꼽았던 통찰력과 도덕성이라는 두 핵심적인 요소는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나는 리더십은 문예적 상상력과 역사적 이해력, 철학적 통찰력 세 요소로 구성돼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삶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도 지금의 역사적인 맥락을 꿰뚫어야 하고 또 그 안에서 문화 예술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심층부까지 파악하는 통찰력, 그것이 없이는 한 나라를 이끄는 것은 불가능하다.”
―혼란한 한국 사회에도 새로운 도약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지.
“한국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선진국이 됐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진국이 된다면 무릇 자체적인 사고방식이 있어야 하고 남의 행동을 따라 하기보다는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에서 나아가 K-학술도 세계로 뻗어가야 한다. 한국의 사상이나 훌륭한 저서들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한국에서 제대로 된 논의의 장이 펼쳐질 때 비로소 선진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익사업이라기 보다는 문화사업… 독자에게 닿기 위해 도서관 등 기증”
■ 대중철학지 ‘타우마제인’
“시간이 지나도 의미가 있는 잡지를 만들어야죠.”
이한구 타우마제인 재단 이사장은 대중철학잡지 ‘타우마제인’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철학 대중화와 교육의 일환이자 “철학 문화를 다시 소환하는 유일한 길”로서 타우마제인은 지난 2023년 8월 창간돼 외로움과 고독, 인공지능(AI), 한류 등 폭넓은 주제로 분기마다 선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최근 출간된 타우마제인 5호의 주제는 ‘한류’다. 이 이사장은 이에 대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젊은 세대가 철학적 사고를 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라며 “AI, 한류와 같이 젊은 세대에 친숙한 동시에 오랫동안 논의될 필요가 있는 주제를 고르기 위해 오랜 기간 회의를 한다”고 밝혔다.
이번 ‘한류’ 편에서는 해외에서 열광하고 있는 한류에 대해 피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국내의 상황을 짚어낸다. 대중문화를 넘어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기 위한 성공비결과 앞으로의 방향을 이택광 경희대 교수를 비롯해 다양한 필진이 소개한다. 이 이사장은 한류를 “한과 정과 흥으로 압축되는 한국인 문화유전자의 한판승”이라고 설명했다.
책을 읽지 않는 사회, 더욱이 잡지는 팔리지 않는 시대에 대중철학지를 통해 수익을 낼 수는 없을 터다. 이 이사장은 “수익 사업보다는 문화 사업이라는 접근”이라며 “이 때문에 ‘타우마제인’ 잡지 같은 경우에도 공공기관이나 도서관 등에 기증해 독자들에게 닿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설명했다.
문화 사업의 일환으로 타우마제인 재단은 잡지 발간 이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인문철학을 주제로 한 일반대중 강연과 고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철학캠프 운영, 포럼 운영과 학회 지원, 독서·철학 동아리 지원 등 모두 젊은 세대를 위한 지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 이 이사장은
△경남 산청 출생(1945) △서울대 문리과 대학 철학과에서 철학전공 △성균관대 인문학부 교수(1980∼2011) △뮌헨대, 브라운대, 동경여대, 위스콘신메디슨대 연구교수 한국철학회 회장(2006) △계간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장(2004∼2010) △성균관대 명예교수(2011∼현재) △경희대 석좌교수(2013∼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2014∼현재) △재단 ‘타우마제인’ 이사장(2022∼현재)
신재우 기자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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