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전 여행 자유화 시행되자 해외 나가 웃지 못할 촌극 봇물 요즘 젊은이들은 관광지 대신
맛집 찾고 호젓한 해변서 힐링 명승지에 버젓이 낙서행위 등 여전히 철부지 여행객들 ‘눈살’
여행은 혼자보다 둘이 좋다. 심심하지 않고, 비싼 음료수 한 잔을 둘이 마시면 경비도 절약된다. 곤경에 처할 때 서로 의지가 되고, 한 사람이 영어, 한 사람이 프랑스어가 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 환상의 조합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반대 의견도 많다. 여행을 왜 둘이 가나, 혼자 떠나라! 둘이 가면 싸운다. 정말 둘이 가면 싸울까. 이웃 나라 일본에 한때 ‘공항 이별’이 유행했다. 둘이 신혼여행을 갔다가 귀국하자마자 갈라섰다는 ‘나리타 와카레(이별)’. 그러나 여행을 가서 서로 몰랐던 사실을 알았을 뿐, 여행은 아무 죄가 없다. 많은 사람이 둘이 셋이, 또는 열 명씩 여행을 가 잘만 놀고 돌아온다.
돌이켜보면 35∼36년 전, 여행 자유화 봇물이 터지면서 항공사가 피서철도 아닌데 연일 대박이 났다. 대박만큼 열병 같은 몸살도 함께 겪었다. 초창기 용감무쌍한 여행객들이 돈과 여권만 챙겨 가이드 꽁무니만 쫓아갔다. 웃지 못할 촌극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난생처음 미국을 갔는데 웬 커피를 항아리만 한 잔에 주나. 촌뜨기 취급 당할까 봐 간신히 다 마셨더니, 앗! 보이가 또 따라 주러 왔다. ‘그만! 됐습니다!’ 그 간단한 영어가 왜 그때 생각이 안 나나. 처음으로 커피를 먹고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보러 갔는데 표범은커녕 못생긴 원숭이랑 코뿔소만 멀리서 봤다. 불평을 했더니, 가이드가 킬리만자로가 아무 데나 있는 햄버거 집이 아니라고 핀잔을 주었다.
베네치아 뱃사공이 노래를 성악가 뺨치게 부른다고 해서 곤돌라를 탔는데 뱃사공 할아버지가 하필 콧물감기에 걸려 소원 성취를 못 했다. 짜증을 낼 게 아니고 열쇠고리라도 주면서 몸조리 잘하라고 할 걸. 호텔에 와서 후회했다.
바티칸 소방수는 일 년 내내 불 한 번 끄는 일 없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다고 해서 함께 셀카를 찍을 마음으로 갔는데 코빼기도 못 봐, 헛돈 쓴 게 뼛골이 쑤셨다. 또 어떤 이는 엄청 외국어 공부를 해서 갔는데, 얼짱 가이드가 하루에 몇 나라씩 뺑뺑이를 돌려 한마디도 못 써먹었다. 가이드 아가씨는 하루종일 사람 머릿수만 세고 소리를 지르고 휴대전화만 들여다봤다. 그 가운데 우리를 가장 웃긴 것은 어느 국가대표 운동선수의 여행 후기였다. 입국 카드에 성별(SEX)란을 들여다보며 고심을 거듭하던 청년이 살짝 낮은 목소리로 ‘감독님! 한 달에 몇 번 한다고 쓰죠?’ 물었다. 감독은 대답 대신 청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림 = 강철수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 수준. 스페인 어느 공항에서 탑승 시간이 딜레이 됐을 때, 몇몇 한국 관광객이 공항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고스톱을 쳤다. 어찌나 손바람이 요란한지 외국인들이 삥 둘러서서 구경을 했고, 불법 도박장을 개설했다고 누가 신고를 해 공항경찰까지 왔다. 결국,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 경찰은 화투 한 벌을 기념품으로 얻어갔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쓴웃음이 나는 최고 히트작은 ‘비 오는 날의 로마 골목’이다. 방송사 카메라맨 A 씨가 로마에서 촬영을 하다가 소변이 급했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화장실이 안 보여 카페에 들어갔다. 얼른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슬쩍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서 어디 어디로 가란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A 씨는 처절하게 골목을 헤매다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에에잇! 전봇대 뒤에다 배뇨를 하고 있는데 앗! 저쪽에서 경찰관이 오고 있지 않은가. 내가 로마까지 와서 노상방뇨죄로 체포되는구나! 이 무슨 나라 망신! 그런데 경찰관도 좌우를 살피더니 담벼락에 실례를 시작했다. 공범 관계 두 사람은 10미터 간격을 유지한 채 나란히 서서 생리 활동을 이어갔다. 아주 오래오래.
TV를 ‘먹방’이 점령하다시피 했다고 하지만, 여행만큼 끝도 없이 쏟아지는 에피소드의 보고(寶庫)가 또 있을까.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세월이 약손인지 생각지도 않던 경사가 났다. 연일 촌극을 생산하던 독특한 개성미의 K-여행객은 이제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다. 공항에서 고스톱도 안 치고 떠들지도 않는다. 싹쓸이 쇼핑도 사라지고, 그 비싼 코냑을 맥주잔으로 원샷 하는 아재도 없다. 그렇다고 갑자기 짠돌이가 된 것도 아니다. 적당히 쓰고 적당히 마실 줄 아는 품위 있는 ‘범생이’ 투어리스트가 된 것이다. 정치가 4류로만 머무니 국민이 1류가 되기로 작정한 것일까.
젊은이들은 굳이 유명 관광지를 찾지 않는다. 카메라에 절경을 담으려 기쓰지 않고 식탐과도 거리를 둔다. 그들은 놀러 가는 게 아니고 쉬러 간다. 그저 흔한 돈가스, 우동, 카레, 베트남국수를 먹고 이름 모를 해변에서 파도멍을 때린다. 만난을 헤치며 살아가는 어부들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듯이….
오늘도 그들은 얇은 지갑을 매만지며 무박2일 여행 준비를 할까.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 아직도 일부 철부지들이 해외에 나가 ‘아무개 왔다 가노라’ ‘사랑한다 ○○아’ 낙서를 명승지에 남기고 온다. 지역에 따라 체포될 수도 있는 범죄다. 낙서가 그렇게도 하고 싶으면 바닷가 백사장에다 해라. 얼른 물에 씻겨 나가게. 그리고 제발 부탁이다. 한글로 쓰지 마라. K-팝, K-푸드, K-드라마가 전 세계로 퍼져 갈매기들도 한글을 알아볼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