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송몽규 순국 80주기 헌화식… 조카 송시연 씨 증언
고종사촌 윤동주 이어 순국
글 솜씨 탁월하고 연설 잘해
중학생 때부터 독립운동 참여
송 순국한뒤 화장장 못찾자
담당간수가 찾아와 주선해줘
‘무덤서 통곡한 여인’ 일화도
글·사진=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큰아버지(송몽규)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부친 송창희, 육촌조카 송희규)이 시신을 찾으러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화장을 하려면 보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일본에 오래 머무를 경비도 부족해서 걱정을 했답니다. 그 때 형무소에서 큰아버지를 담당했다는 일본인 여성 간수가 찾아와서 ‘너무 총명하고 대단한 사람을 일본이 죽여서 미안하다’라며 빨리 화장해 돌아갈 수 있도록 주선해줬습니다. 그래서 3일 만에 화장을 한 후 유해를 당시 거주하던 중국 연길 명동촌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난 7일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서 열린 ‘송몽규(1917~1945) 선생 서거 80주기 헌화식’에서 만난 송시연(56)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송 씨는 송 선생의 동생 송우규 씨의 딸이다. 그는 북한의 함북에서 살다가 탈북해 지난 2007년 한국에 왔다. ‘국제PEN 망명북한펜센터’ 회원으로 북한 실상을 알리는 작품을 쓰고 있다. 송 씨는 “중국에서 살다가 고향인 함북으로 돌아왔던 할아버지(송창희)와 가족에게서 큰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돌아가신 지 80주년이 됐음에도 이렇게 기억해주신다니 참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송몽규는 영화 ‘동주’에서 배우 박정민이 연기한 인물로, 독립운동가이자 청년 문사였다. 그의 문학 작품집이 묶이지 않고 해방 후 유족이 북쪽에 거주했던 탓에 남쪽에서 덜 알려졌으나 일제강점의 암흑기에서 한국문학을 지킨 별이었다.
그의 어머니(윤신영)가 윤동주(1917~1945) 시인의 고모였다. 고종사촌 간인 윤동주와 송몽규는 같은 해에 태어나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도 함께 간 평생의 동지이자 문우였다.
송몽규는 중학 3년인 18세 때 엽편소설(콩트) ‘숟가락’을 써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이것은 사촌이자 절친인 윤동주의 문학 창작에 큰 자극을 줬다고 한다. 은진중 동창인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생전 회고한 바에 따르면, 송몽규는 어려서부터 연설을 잘하고 리더십이 뛰어났다. 부끄러움이 많고 사색적이었던 윤동주는 그런 송몽규를 부러워하면서도 좋아했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은진중 4학년 때는 중국 상하이 임정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됐고, 고초를 겪고 풀려난 후 계속 감시 대상이 됐다.

그는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인 1942년 26세 때 “일본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며 집안의 반대에도 일본 유학을 결행하고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윤동주는 같은 시기에 도쿄의 릿쿄대에 들어갔다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겨 송몽규와 재회했다. 두 사람은 1943년 7월 ‘교토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일경에 잡혀 각각 2년 형을 선고받았다. 후쿠오카형무소로 이송돼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운명했다. 29세였다. 사망 전보를 받은 윤동주의 부친(윤영석)과 당숙(윤영춘)이 후쿠오카형무소로 가서 송몽규를 만났는데, 그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했다. 윤동주가 절명한 지 19일 후인 3월 7일 송몽규도 세상을 떠났다.
“유망했던 두 청년이 죽었으니 집안 어른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1945년 가을 무렵에 목단강시(牧丹江市)에 산다는 한 젊은 여성이 4~5세쯤의 아이 손을 잡고 찾아와 송몽규 선생 묘지가 어디냐고 묻더래요. 어른들은 경황이 없는 중에 제대로 응대를 하지 못하고 묘소만 알려줬는데, 그 여성이 묘지 앞에서 한참을 통곡하고 갔답니다. 할아버지가 나중에 그 여성을 소홀히 대한 것을 후회하셨답니다. ‘잘 차려입고 귀티가 나는 그 여성 집안에서 몽규의 유학비와 독립운동 자금을 대준 것이 아니었을까. 그 아이도 몽규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큰아버지가 워낙 잘 생기고 똑똑했기 때문에 여성과의 로맨스가 있었을 것이라고 집안 어른들이 말씀하셨어요.”
송시연 씨의 이런 증언은 그동안 없었던 것이다. 한국문학사를 연구해 온 이승하 중앙대 문창과 교수는 “윤동주의 평생 동지였던 송몽규 선생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증언”이라고 했다.
송 씨는 이런 이야기도 전했다. “할머니(송몽규 어머니 윤신영)의 아들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해요. 나중에 치매에 걸려서 ‘잘생긴 내 아들’이라며 하도 이야기를 해서 주변 사람들이 피해 다닐 정도였다네요.”
7일 열린 ‘80주기 헌화식’엔 송 씨와 윤동주 장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 유족과 연세대 재학생들이 참석했다. 행사는 1시간 만에 끝나 짧았으나, 여운은 길었다. 마침 이날 연세대 교정에선 동아리 신입생 모집 활동이 한창이었는데, ‘연세문학회’에선 윤동주, 송몽규, 기형도 사진을 걸어놓고 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을 배출한 연세대, 나아가 한국의 문학 원천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자리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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