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숙의 Deep Read - 미·우크라 파국과 한국

미국우선주의 앞세우며 침략국 옹호하고 피해국 비난… 시대착오적 비자유주의 행태
러·북 군사협력의 우크라戰, 한반도 안보에 직접 영향… 韓, 가치외교 지키며 자강해야


최근 파국으로 끝난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정상회담 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충성파인 마이크 왈츠 국가안보보좌관은 “이것이 미국 우선주의를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증거”라고 으스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전쟁 종결에 필요한 미국의 확고한 안전보장 약속을 받아내는 데 실패했다. 유럽 국가들엔 미국이 2차대전 후 만들고 이끌어온 자유세계 질서의 리더 자격 상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트럼프의 도박

트럼프는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무시하는 반동주의, 영토 침략을 용인하는 시대착오, 전통적 동맹보다 권위주의적 독재자를 선호하는 병적인 비자유주의를 형상화해 가고 있다. 침략국보다 피해국을 비난하고 전쟁의 와중에 팔을 비틀어 불평등한 광물협정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모습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피 흘리고 식량 원조를 해주고 전후 복구를 도와주면서 북한의 도발을 막아준, 자유와 민주·인권의 선한 미국이 아니다.

트럼프는 자신이 집권하면 24시간 안에 전쟁을 종결짓겠다고 호언했었다. 당선된 지금의 행동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는 데만 신경을 쓴 나머지 어떻게 끝내야만 정의롭고 항구적인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지는 안중에 없는 듯한 모습이다. 2014년과 2015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상호 불신 속에 실패했던 사례를 보면 억지로 마무리한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미국은 중국 견제와 포위를 최우선 세계 전략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미·중 대결 국면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분리하려는 속셈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역(逆)키신저’ 전략과도 통한다. 유사한 논리로 러시아와의 직접 협상을 통해 장래 북한과의 유리한 딜을 위한 실마리를 얻고자 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과거 냉전 시기 중·러 간 경쟁 심리와 지금 중·러 관계는 다르며, 또한 러·북 사이에 미국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끼어들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따라서 매우 불확실한 장래의 성과를 기대하며 종래 지켜온 확실한 자산을 포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국의 장기적 이익을 크게 훼손시키는 아슬아슬한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멜로스의 교훈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의하면 2500년 전 아테네는 작은 섬나라인 멜로스의 대표에게 델로스 동맹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으나 멜로스가 중립을 고집하자 절멸을 위협하며 최후통첩을 한다. ‘강자는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피해는 약자의 몫이다’(The strong do what they can and the weak suffer what it must). 결국 멜로스를 힘으로 함락하고 성인 남자는 모조리 학살했다. 아테네의 잔인함은 그리스반도 전체를 전율시켰고 도시국가들로부터의 외면을 자초해 결국 패전과 몰락의 길을 걸었다.

유럽은 미·우크라이나 정상회담 실패의 충격 속에 영국 런던에서 10개국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우크라이나 지원 재확인, 대러시아 제재 유지, 우크라이나 배제 하의 평화협상 반대 등 입장을 밝혔다. 나토 동맹에서 미국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유럽 자체적인 우크라이나 평화유지군을 형성하자는 의견이 싹트고 있다. 유럽을 더욱 뭉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군사·경제 지원 없이는 유럽 안보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유럽 지도자들은 잘 알고 있다. 트럼프는 본보기로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잠정 중단했고, 결국 젤렌스키는 미국과의 광물협정에 서명하겠다고 무릎을 꿇었다.

이번 정상회담 후 대만·한국·일본 등에서도 미국에 대한 전통적 신뢰에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엔 동맹과의 공조가 필수인데 우크라이나 대응과 냉정한 거래적 동맹관을 보면서 방기의 두려움으로 심리적 동요가 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접근을 차근차근 강화해 가고 있다. 세계적 차원의 동맹과 우방 유지 구조에 있어서조차 미국의 절대 우위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 공백은 외교·안보에 불가피한 한계와 취약점을 야기한다.

◇우크라戰의 교훈

유엔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러시아의 침략 책임 표현이 빠진 결의안이 토의·통과될 때 한국이 보여준 입장은 일관성과 자신감이 결여된, 비겁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글로벌 중추 국가와 가치외교의 모습은 실종됐다. 북핵 문제, 미·북 협상, 주한미군과 동맹 등 산적한 안보 및 동맹 현안을 미국과 협의해야 하는 입장에 대한 고민도 있었겠지만,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된 기본 원칙을 외면할 경우 추후 되돌아올 부작용에 대한 고려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폭정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20세기 폭정의 20가지 교훈 중 첫 번째로 꼽은 것은 ‘미리 알아서 복종하지 말라’였다. 히틀러의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오스트리아는 미리 겁먹고 스스로 알아서 유대인 학대를 자행했고 사람들은 학대에 동참함으로써 절망감에 빠진 유대인 자살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미리 알아서 비굴하게 굴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시사와 교훈을 준다. 첫째, 지정학의 회귀다. 이 현상은 강대국 간 패권 경쟁이 앞으로도 쉽게 정리되지 않고 오래 지속될 것임을 시사한다. 둘째, 유럽과 아시아의 안보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러·북 간 군사협력 긴밀화와 북한군 파병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뜻한다. 셋째,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 독재자의 야욕은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정면 위반하고 전쟁으로 가는 주요 요소가 된다.

훗날 오늘의 한국을 뒤돌아본다면 지금이 치명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고 할 만큼 국가 운명에 결정적인 변곡점이다. 국민이 합심해 국가적 어려움을 끈기 있게 버텨내야 한다. 처칠이 말했듯, 지옥 속에 있다면 계속 나아가는 것만이 답이다.

◇대한민국의 운명

대한민국이 젤렌스키와 같은 모욕을 당하지 않고 밖에서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불안감에 휩싸이거나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 자강해야 한다. 자강의 요소는 심리적 자신감과 튼튼한 군사력이다. 그래야 어느 누구도 우리 없는 데서 우리 운명을 결정지으려 하지 못할 것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전 유엔대사,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용어설명

멜로스의 교훈 :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정상회담 결과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의한 힘의 논리에 무너지는 고대 ‘멜로스의 교훈’을 일깨워줌. 대만·한국·일본 등에서도 미국에 대한 전통적 신뢰에 회의론이 제기되는 형국.

‘역(逆)키신저’ 전략은 1970년대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소련 고립을 위해 중국과의 밀착을 추구했던 것을 거꾸로 하는 전략. 즉 중국 견제와 포위를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을 추진하는 것을 일컬음.


■ 세줄요약

트럼프의 도박 :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침략국 러시아를 옹호하고 피해국 우크라이나를 비난하는 건 국제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훼손한 행태. 이는 세계질서의 리더 국가인 미국에 대한 회의를 부르게 하고 있어.

우크라戰의 교훈 : 러·북 간 군사협력 긴밀화와 북한군 파병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해줘. 한국은 가치외교 원칙 속에서 심리적 자신감과 튼튼한 군사력으로 자강해야.

‘멜로스의 교훈’은 국제정치에서 왜 도덕과 규범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지를 보여줌. 아테네가 약소국 멜로스를 멸망시킨 것을 미국이 침략 피해국인 우크라이나를 비난하는 것에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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