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개발처(USAID) 공무원과 시민들이 지난달 28일 워싱턴DC USAID 건물 앞에서 해고될 때 짐을 담아 나르는 종이상자에 ‘USAID 영원히’라는 문구를 적고 정부의 USAID 폐지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UPI 연합뉴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공무원과 시민들이 지난달 28일 워싱턴DC USAID 건물 앞에서 해고될 때 짐을 담아 나르는 종이상자에 ‘USAID 영원히’라는 문구를 적고 정부의 USAID 폐지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UPI 연합뉴스


■ Global Window - 트럼프‘국제개발처 자금 지원 중단’행정명령 50일

‘예산 절감’이유,원조 올스톱
미국, USAID 사실상 해체수순
계약 6200개중 5800개 폐기

나이지리아 급식소 문 닫고
민주콩고 엠폭스 확진 폭증
모잠비크는 에이즈 ‘무방비’
국가위기 사태로 번질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의 해외 개발 원조를 담당하는 국제개발처(USAID)에 대한 연방자금 지원을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지 10일(현지시간)로 50일을 맞았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경찰이자 후견인 역할을 해온 미국이 ‘예산절감’을 이유로 지원을 일순간에 중단하면서 전 세계에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USAID의 영향력이 워낙 컸던 탓에 자금 지원 중단 여파는 국가, 지역,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USAID 사업 6200개 중 5800개 폐기 =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20일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90일간 대외 개발 지원을 동결시킨 후 해당 업무를 맡아온 국무부 산하 USAID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국무부가 법원에 제출한 서류를 보면 국무부는 1만 명가량인 USAID 직원 수를 290명으로 줄이기로 하고 USAID가 외부 단체들과 맺은 총 6200개의 다년 계약 중 5800개를 해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국무부 보조금 9100개 가운데 4100개도 없앴다. 이 같은 방침은 이메일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전 세계 국가와 단체에 신속하게 통보됐다.

미국의 지원이 하루아침에 끊기자 여파는 즉각 나타났다. 국제 식량 지원의 40%를 차지하는 미국의 지원이 중단되자 나이지리아 등에서는 비상급식소가 문을 닫으면서 수천 명의 아이들이 아사 상황에 내몰린 상황이다. 또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자금이 중단되면서 에볼라, 엠폭스 등 위험한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위험 병원균이 방치되고 공항 등에서 전염병 감염 검사가 중단되면서 전염병이 국경을 넘어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엠폭스 발병 사태를 겪고 있는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에서는 미국의 지원이 끊기면서 최소 400명의 확진자가 방치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방역에 구멍이 뚫리자 아프리카의 다른 12개 국가에서도 환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적으로 미국에 에이즈 치료 프로그램을 의존하고 있는 모잠비크와 말라위 등에서는 국가위기 사태까지 우려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USAID 보건담당자를 인용해 미국의 지원 중단으로 “매년 에볼라·마르부르크 확진자와 마비성 소아마비 확진자가 각각 2만8000명과 20만 명씩 늘어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대외 원조 중단으로 여성 인권 하락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여성 인권을 위한 USAID의 콘돔 지급 사업이 중단되면서 짐바브웨에서는 수십 만의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돼 올해에만 8300명이 출산 중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또 6학년 이상의 모든 여성에 대한 교육이 금지된 아프가니스탄의 10대 소녀들을 위한 교육도 중단돼 이슬람 국가의 여성 인권 제고 노력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전쟁 피해 복구와 마약 단속을 위한 국제사회 움직임에도 비상이 걸렸다, 베트남에서는 고엽제 피해자 지원, 불발탄 제거 등 베트남전 피해 지원 사업이 멈춰 섰다. 이에 따라 베트남 내에서는 반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베트남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의 자금 지원 중단으로 멕시코 만사니요 항구에 대한 마약 단속 장치·화물 스캐너, 약물 검사 장비 제공 등이 막히면서 마약 단속을 확대하려는 유엔의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미국의 지원이 끊기면서 북한 인권단체나 미얀마의 민주진영,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내 무슬림 등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진영 단체들도 타격을 입게 됐다고 덧붙였다.

◇지원 재개될 수 있을까… 법원 잇따라 제동 = 트럼프 대통령이 USAID 폐지 강행 의지를 내비치고 있지만 연방법원이 트럼프 결정에 잇따라 제동을 걸면서 해외 원조 지원 사업의 향방은 당분간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추진과 법원의 제동이 이어질 경우 지원과 중단이 반복되며 당분간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 연방대법원은 지난 5일(현지시간) 대외 원조 중단 내지 유예를 금지한 연방법원의 결정을 뒤집어달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요청을 기각했다. 앞서 워싱턴 연방법원이 지난달 13일 에이즈백신수호연합, 글로벌보건위원회 등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트럼프 정부 취임 전에 체결된 계약에 따른 원조 프로그램 지원을 중단하거나 유예하는 것을 금지하자, 이에 반발해 연방 법원의 결정을 뒤집어달라고 한 트럼프 행정부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이번 결정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자금 지원을 촉구하는 다른 단체들의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법적 대응을 예고하며 USAID 폐지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어 모든 지원이 재개될지는 미지수다.

미국의 대외 원조 중단을 미·중 패권 경쟁과 연결해 미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BBC는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발을 빼면서 중국의 세계 영향력이 커지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관측했다. 실제 중국은 최근 미국이 자금 지원을 중단한 캄보디아 지뢰대응센터에 440만 달러(약 64억 원)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기존에 미국이 지원했던 기부금(20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BBC는 “중국이 미국의 공백을 재빨리 틈타 소프트파워를 강화할 기회로 삼고 있다”며 “중국은 서방의 쇠퇴를 바라는 장기적인 전략을 펼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 원조 중단은 중국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황혜진 기자 best@munhwa.com

지난해 8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무니기의 한 진료소에서 한 아이가 엠폭스 진단 검사를 받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해 8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무니기의 한 진료소에서 한 아이가 엠폭스 진단 검사를 받고 있다. AP 연합뉴스


“내정 간섭” 불편해하던 중남미는 반색…“USAID 폐지는 옳다”

‘쓴소리’단체들 자금줄 끊겨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국내외 우려와 반대에도 미 소프트파워 외교의 상징인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강행하는 것에 대해 일부 중남미 국가들이 반색을 표하고 있다. 특히 미국이 USAID를 통해 내정에 간섭해왔다고 비난해온 베네수엘라와 엘살바도르, 멕시코 등은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USAID가 이러한 권위주의 국가에서 활동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단체를 지원해온 만큼 USAID 폐지 추진으로 전 세계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부정선거 의혹 속에 야당을 탄압하며 3선을 확정 지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USAID는 폐지가 옳다”며 환영 입장을 밝혔다. 그는 “지금껏 USAID가 (부정선거를 주장해온) 야당에 제공한 지원은 ‘부패의 블랙박스’인 만큼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폭 소탕전에서 인권 탄압 비판을 받고 있는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도 USAID가 폐지된다는 소식을 반겼다. 부켈레 대통령은 X에 글을 올려 “USAID 기금 대부분이 정치적 의제를 가진 반대 야당이나 NGO로 흘러들어 간다”며 “USAID는 지나치게 자국 내정에 간섭해왔다”고 강조했다.

멕시코는 미국이 USAID의 인도적 지원을 무기로 삼아 세계 패권국의 영향력을 확대해왔다며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USAID 폐지 방침에 찬성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은 정례 브리핑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실제로 다른 나라를 돕고 싶다면 그 의도를 먼저 투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며 “현재 USAID가 전 세계 많은 부분에 관련돼 있어 사실상 폐지하는 게 낫다”고 얘기했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의 USAID 폐지 강행 방침에 권위주의 국가들이 반색한 것은 그동안 쓴소리를 하던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힘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감시 역할을 해온 각종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자금줄이 대부분 끊기게 된 상황이다.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파운데이션(HRF)의 설립자인 토르 할보르센은 “이런 필수적인 노력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하는 것은 독재 정권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자유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개인들을 약화시킨다”고 강조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국제 연구 책임자인 제이크 존스턴은 “USAID가 하는 일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촉진하기 때문에, USAID가 폐지돼선 안 된다”고 피력했다.

정지연 기자 jjy0725@munhwa.com
황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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