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성민의 Deep Read - 위대함 잃어가는 대한민국
트럼프의 ‘마가’는 미국 위대함 아닌 쇠락의 징표… 한국도 ‘가치’ 아닌 ‘힘’의 논리만 판쳐
보수는 색깔론과 자기애적 편견에서 벗어나고, 진보는 독선과 독주의 관성에서 탈주해야

한국의 정치사회도 극단적 대적(對敵)관과 힘의 논리 속에서 길을 잃었다. 야권의 줄탄핵과 ‘다수의 폭정’이 그랬고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그랬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헌법재판소의 적법절차 훼손이 그랬다.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에서 정상성을 상실했다. 보수는 시대착오적 색깔론과 자기애적 편견에서 탈주해야 하고, 진보는 독선과 독주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트럼프시대의 교훈
트럼프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쫓아낸’ 후 트럼프 취임사를 다시 들춰봤다. “미국의 황금시대가 지금 시작됩니다. 오늘부터 우리나라는 다시 번영하고 전 세계에서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을 최우선으로 할 것입니다.…멕시코만의 이름을 미국만으로 바꾸고, 위대한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이름을 마운트 매킨리로 되돌려 놓을 것입니다. 매킨리 대통령은 관세와 재능을 통해 우리나라를 매우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우리는 정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겁먹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미국이 더 이상 위대하지 않다’는 역설과 다름없다. 트럼프가 위대한 대통령이라 추앙한 윌리엄 매킨리는 미국 영토를 가장 넓힌 대통령이다. 알래스카의 ‘디날리산’은 매킨리의 이름을 따 불리다가 2015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현지어인 디날리산으로 바꿨는데, 트럼프가 다시 ‘매킨리산’으로 되돌려 놓았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과 영토 야욕은 매킨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가치의 시대가 가고 힘의 시대가 왔다.
2012년 전파를 탄 미드 ‘뉴스룸’ 첫 장면은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국가가 아니다’로 시작한다. ‘뉴스룸’의 작가 에런 소킨은 앵커인 주인공의 입을 빌려 왜 미국이 더 이상 위대하지 않은지를 구체적으로, 그러나 냉소적으로 설명한다. “문자 해독률 7위, 수학 27위, 과학 22위, 기대 수명 49위, 영아 사망률 178위, 노동력 4위, 수출 4위인데 국민 1인당 수감자 수와 국방비만 1위이다.” 트럼프가 침략국 러시아를 옹호하고 침략의 피해국인 우크라이나를 비난한 것은 위대한 미국이 아닌 쇠락하는 미국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힘이 가치인가
소킨에 따르면 미국의 위대함은 과거의 일이었다. 정의라는 이유로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했고 막아내기도 했던 과거,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서 싸우되 가난한 이들과 싸우지는 않았던 과거, 공연히 힘으로 으스대지 않았던 과거가 있었다. 위대한 건축물을 짓고 신의 권능에 도전할 만한 과학적 기술들을 이룩했으며 우주를 탐험하고 질병을 물리쳤던 과거가 있었다. 세계 최고 예술가를 양성했고, 세계 최고의 경제를 이룩했고, 별을 향해 나아가며 지성을 동경했고,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던 것 역시 지난날의 일이었다. 소킨은 하지만 현재의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국가가 아니라고 비감해 했다.
‘돈’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고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야 존재 이유를 발견하며 ‘힘’으로 눌러야 존립할 수 있는 나라라면 더 이상 위대한 나라가 아니다. 로마를 포함한 위대한 제국은 포용할 때 흥했고, 힘으로 누를 때 약해졌다. 트럼프의 거친 입, J D 밴스의 무례함, 일론 머스크의 전기톱은 미국의 쇠락을 보여주는 징표다. 권위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우방을 조롱하는 미국은 위대하지 않다. 세상을 힘과 돈의 프리즘으로만 보는 트럼프 월드에 가치는 사치다.
총알도 비켜 간 트럼프는 미국의 쇠락, 백인의 위기, 미국 교회의 쇠퇴를 일거에 해결해 줄 메시아처럼 군림했다. 팀 앨버타는 ‘나라, 권력, 영광’에서 한때는 가장 약한 지지층이었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지금은 왜 트럼프의 굳건한 지지자가 되었는지를 심층적으로 추적했다. 미국 교회의 변질은 한국 교회의 창이다. 주기도문의 구절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인데, 왜 교회는 세속적 권력과 영광을 위해 나서는 것일까.
◇비정상성의 한국
한국 역시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모두 관용과 절제를 버리고 힘을 앞세워 자신들이 이룩한 업적을 짓밟고 있다. ‘1987 체제’를 쟁취한 민주화 세력이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보수 세력이 자유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다. 가치는 간데없고 힘의 논리만 나부끼고 있다. 두 세력이 함께 자유민주주의를 죽이고 있다. 이제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심폐소생이 아니면 살아날 수 없는 심정지 상태다.
하늘의 권세와 영광이 아니라 세속의 권력을 좇는 것은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 말해야 할 순간은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암흑의 시대일 때다. 누구나 말할 수 있을 때는 말할 필요가 없다.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오바마 대통령 당선 이후 이른바 ‘PC’(정치적 올바름)에 맞서 정체성 전쟁 선봉에 섰듯, 한국 보수 교단도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반대 선봉에 섰다. 진보 교회 역시 광장에서 보수 진영을 악마화하며 척결을 외친다.
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는 미국의 쇠락이 보여주듯 무엇을 반대한다는 것은 쇠락을 상징할 뿐이다. 정치인과 정당이 정치를 포기한 공간에 정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교회와 사법체계가 정치의 한복판에 들어왔다. 공수처는 수사영역도 아닌 대통령 내란죄 수사를 강행하고 영장쇼핑을 통해 현직 대통령을 불법 체포·구속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헌재는 대통령 탄핵심리와 증거 수집에서 적법절차 훼손과 함께 극심한 정치 편향 논란을 불렀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민주당의 29번에 이르는 줄탄핵, 무너진 법치, 좌우로 갈라진 교회의 선전·선동 모두 비정상이다. 위대함은 상대가 존경하고 인정하는 가치, 즉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에서 나오는 것이지 폭력이나 가짜뉴스와 같은 샤프파워로 얻을 수는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은 시대착오적 색깔론과 자기애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다시는 주류가 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진보 진영은 다양성·민주주의·인권 존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비주류로 쪼그라들 것이다. 위대함의 가치를 알아야 위대해질 수 있다.
정치컨설팅 민 대표
■ 용어설명
‘에런 소킨’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미국의 극작가. 2010년 영화 ‘소셜 네트워크’로 아카데미 각색상, 골든글로브 각본상 등 수상. 드라마 ‘웨스트 윙’ ‘뉴스룸’ 등을 씀.
‘윌리엄 매킨리’는 미국의 25대 대통령. 고율의 수입관세 도입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실천했고,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기며 쿠바·필리핀 등을 장악해 미국 영토를 가장 넓힌 대통령으로 기록.
■ 세줄요약
트럼프시대의 교훈 : 트럼프가 부르짖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슬로건에는 민주주의 덕목과 가치가 아니라 힘과 돈의 논리가 깔려 있어. 이 슬로건에는 ‘위대한 미국’ 대신 ‘위대함을 잃은 미국’이라는 상실감이 담김.
비정상성의 한국 : 지금 한국의 보수와 진보도 적대감과 힘을 앞세워 과거의 업적을 짓밟고 있는 형국. 대통령의 비상계엄, 민주당의 29번에 이르는 줄탄핵, 무너진 법치, 좌우로 갈라진 교회의 선전·선동 모두 비정상.
무엇을 할 것인가 : 보수 진영은 시대착오적 색깔론과 자기애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다시는 주류가 될 수 없어. 진보 진영은 다양성·민주주의·포용·인권 존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비주류로 쪼그라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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