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신과 의사의 서재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던 즈음에 오시로 고가니의 단편 만화집 ‘해변의 스토브’(문학동네)를 만났다. 여성인 엣짱의 체온은 평균 37도로 높고, 남자친구 스미오는 35도로 낮다. 합쳐서 나누면 딱 적당하며 둘은 함께 살기 시작했고 작은 집 한가운데에 언제나 스토브가 함께했다. 엣짱은 스미오가 감정표현이 적고, 자신이 깎여나가는 것 같다면서 집을 나가고 스미오만 남겨졌다. 엣짱을 그리워하던 스미오는 그녀가 해변에 같이 가자고 했던 것을 기억해내 만나자는 문자를 남기고는 바닷가로 가며 그와 언제나 함께하던 스토브와 같이 간다. 전원이 뽑힌 스토브가 의인화되어 대화하듯 스미오와 교감을 하면서 기다렸지만 엣짱은 나타나지 않았다.
스토브가 식구라는 건 추위에 시달리던 아저씨의 환상인 줄 알았는데, 비슷한 생각을 짧은 단편만화로 풀어낸 작가를 만나는 우연은 감탄을 주었다. 체온이 낮은 남자와 높은 여성, 그리고 그걸 주고받는 감정의 미스매치로 확장시키며 추위를 언제나 함께해주는 스토브의 존재로 이어진 점프의 쾌감.
겨울에만 등장하는 설녀 유키코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트럭에 무작정 올라탄 설녀는 눈을 두려워하는 상상력으로 창조된 존재로 인간의 기억에 남기 위해 본보기로 사람을 얼려 죽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하지만 유키코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자 운전사는 설녀를 집으로 초대해 묘한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설녀는 처음 뜨거운 음식을 먹어보고 함께 영화를 본다. 녹지 않게 얼린 짐칸에 타 여름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설녀는 유카타를 입고 빙수를 먹으며 마쓰리를 간다. 둘에게 평생 잊지 못할 뜨겁고 차가웠던 여름. 설녀는 기괴한 두려움의 소재였다. 그런데 겨울과 추위에 존재하는 반쪽 존재에게 인간의 세상을 보여주고, 여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반전이 몰입감을 줬다.
우리가 공상과 잡념을 꺼리는 이유는 통제하기 힘든 공포 때문이다. 화장실에 갈 때도 자기 전까지 휴대전화를 놓지 않고 무의미한 정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면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어릴 때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꿈을 꿀까?’ 즐거운 기대를 했던 오래전 기억이 떠오르는 책이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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