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16세기 유럽의 마술사들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조행복 옮김│책과함께
과학·미신 사이 존재한 ‘마구스’
암호체계 · 비율측정도구도 제작
지식인 · 기술자 등으로 불리기도
50년간 역사학 다룬 저자 연구
현재 정치인과의 접점도 흥미

‘마술’이 들어간 제목에 기대를 안고 책을 펼쳤다면 당혹스러울 수 있다. 고전적인 카드 마술이나 순간이동 마술을 기대했건만, 목이 아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명을 채우지 못한 사망자의 손을 목에 댄다거나 감기에 걸린 환자가 청개구리의 입속에 침을 뱉으면 낫는다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기괴한 치료법이 바로 15∼16세기 ‘마술’의 정체다. 이 시기 마구스들은 자연을 기반으로 한 기예를 선보였는데 흙 점이나 물 점은 물론 강령술과 손금 읽기까지 나름의 이론과 자연의 원리를 활용해 재주를 부렸다. 비판자들은 악마의 도움을 받은 술수라는 의미의 ‘마술’을 명칭으로 사용했지만 마구스는 자신들의 기예를 심오하면서 무해한 ‘자연마술’ 혹은 ‘신비한 원리’라고 칭했다.
그중에서도 ‘청개구리 치료법’은 당시 ‘대(大) 마구스’로 여겨지던 중세 독일의 사상가 아그리파(1486∼1535)가 책을 통해 소개한 만큼 당대에는 상당한 신빙성을 가졌다. 아그리파의 명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렵의 마술사들은 ‘돌팔이 의사’라거나 ‘주술사’ 같은 취급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마술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감추어진 것들의 특성과 속성을, 자연의 전 과정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평가를 받는 르네상스의 지식인이었고 연금술부터 점성술까지 중세의 최신 문물을 활용하는 기술자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소설 ‘파우스트’ 속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 박사의 역사적 실존 인물로 여겨지는 게오르크 폰 헬름슈타트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책에 따르면 헬름슈타트는 자신을 ‘파우스트 유니오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강령술사의 우두머리”나 “흙과 불의 점술사” “손금 보는 자”라는 수식어를 덧붙였고 여러 도시를 오가며 강령술과 점성술을 선보였다. 물론 그가 행한 마술의 구체적인 내용은 대부분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광학에 조예가 깊고 타고난 무대 체질이었으리라 짐작하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책에 따르면 현실의 파우스트 박사는 당시 자연철학자이자 발명가인 조반니 폰타나가 만들어낸 투사 램프를 활용했는데 마치 그림자 놀이처럼 램프 양초의 불빛 앞에 자그마한 악마의 형상을 놓아 거대한 형상을 벽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그는 공포감을 조성하고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물론 중세의 마술사들이 그림자 놀이만 한 것은 아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학구적인 마술사’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그는 큰 원반과 작은 원반을 조합해 해석할 수 있도록 한 암호체계를 만들었고 이는 20세기에 독일군의 암호 작성기 에니그마의 토대가 되는 기계적 원리를 담았다. 물론 마구스는 흥분한 마녀들과 움직이는 해골을 그린 그림의 제목을 감추는 등 시시한 용도로 암호를 사용하는데 그쳤지만 말이다. 알베르티는 이처럼 회전 방식으로 작동하는 도구를 좋아했다. 그는 청동 원반의 둘레에 추를 매달아 놓고 회전시켜 인체와 조각상의 비율을 재고 좌표를 기록할 수 있는 측정 도구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 또한 혁신이었다.
종교의 영역에도 마술은 여지없이 침투했다. 종교개혁(1517)에 앞서 혼란했던 기독교계에서 마구스는 해괴한 미신을 새로운 종교적 해석이라며 내놓기 시작했고 기독교도가 수십 세기에 걸쳐 수집한 유물은 큰 힘을 발휘했다. 방부 처리된 성인의 유해나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성창과 같은 성스러운 물건들은 효험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마술은 ‘악마를 연상시키지 않는’ 제한적인 범위에서 기독교 사회의 일상적인 기술이 됐다.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책이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다. 50여 년간 프린스턴대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가 작정한 듯 풀어내는 아그리파, 헬름슈타트, 알베르티의 이야기는 이름부터 생소하고 검색해도 관련된 정보가 잘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종교와 결탁한 마술,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에 의존하는 유럽의 지도자들을 보고 있자면 현대의 마구스가 떠올라 읽는 재미가 생긴다. 아그리파와 같은 마구스의 마술은 그 지지자들에 의해 체화되고 퍼져나간다. 아그리파의 광적인 팬이었던 하인리히 두덴은 그의 책에서 두꺼비의 왼쪽 옆구리 뼈가 물을 뜨겁게 데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제로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다.” 21세기에도 아그리파는, 그리고 두덴은 존재한다. 440쪽, 2만8000원.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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