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철환의 음악동네 - 크라잉넛 ‘외로운 꽃잎들이 만나 나비가 되었네’

광화문역 1번 출구로 나가려면 문장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모든 어른은 한때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매일 다녀도 벽에 그런 글씨가 씌어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하지만 멈춰선 누군가에게 글은 길이 되기도 한다.

글을 붙인 이는 자상하게 출처까지 밝혔다. 소설에서 ‘어린 왕자’가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생텍쥐페리가 레옹 베르트에게 건네는 헌사 중 일부다. 부랴부랴 서가에서 꺼내 휙휙 넘기지 마라. 펼치면 바로 첫 장에 나온다. “이 어른은 지금 프랑스에 사는데 춥고 배고프다.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심영아 옮김) ‘어린 왕자’는 그저 시간을 보내 어른이 되어버린 지구상의 모든 레옹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이자 계고장이다.

플레이리스트에서 음악을 꺼낸다. 오늘은 ‘나의 아저씨’(tvN)를 만난다. 나에겐 첫 소절이 광화문역 1번 출구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손디아 ‘어른’) 따로 독서 시간을 내기 버겁다면 걷거나 앉아서 5분만 음악에 할애하자. 굳은 석회질을 영혼의 아교질로 바꿀 기회다.

노랫말 ‘어른’ 속엔 어른이란 단어가 안 나온다. 오히려 ‘웃는 사람들 틈에 이방인’만 넘친다. 그곳에선 ‘갤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과 ‘바보 같은 나는 내가 될 수 없단’ 자각이 소용돌이친다. ‘정신없이 한참을 뛰었던 걸까. 이제는 너무 멀어진 꿈들. 이 오랜 슬픔이 그치기는 할까.’ 마침내 노래는 닻을 내린다. ‘눈을 뜨고야 그걸 알게 됐죠.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 나의 작은 세상은 웃어 줄까.’

마음을 모으면 심해에 서식하던 노래가 그물망에 걸리기도 한다. 오늘은 영화 ‘바튼 아카데미’(원제 The Holdovers)에서 해초 한 더미를 건졌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라비 시프리(Labi Siffre)가 부른 ‘울고 웃고 아끼고 속이고’(Crying Laughing Loving Lying)다. 서양식 희로애락인데 경종은 마지막 줄에서 울린다. ‘거짓말은 누구에게도 안 좋은 일인데 어떻게 지금도 난 속이고 있을까.’(Lying never did nobody no good, no how, no how So why am I lying now)

속이는 게 버릇이 되면 시선의 노예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간판엔 울음(Crying)을 걸어놓고 시종일관 웃으며(Laughing) 달려온 청년들이 있다. ‘닥치고 가만 있어’ 불손한 위협에도 30년을 저항한 명랑군단 크라잉넛이다. ‘살다 보면 그런 거지’ 체념한 듯 보이다가도 ‘사랑(Loving)은 어려운’ 걸 알기에 ‘우리는 달려야 해 거짓(Lying)에 싸워야 해’(‘말달리자’) 투쟁하며 전진한다.

30년 노래하기도 어렵지만 30년 후 신곡 내긴 더욱 어렵다. 초심 동심 진심이 하나로 연결된 결과다. 신곡 속에선 여전히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난 살아있다고 다시 한 번 달릴 수 있다고’ 다짐하는 노래 제목(‘외로운 꽃잎들이 만나 나비가 되었네’)을 들으니 장자(莊子)가 말한 화이위조(化而爲鳥·물고기가 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가 떠오른다.

모든 어른은 한때 어린이였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몸은 늙어도 혼은 낡지 않는다. ‘홍대 길바닥을 뒹구는 낙엽처럼 굴렀지… 매일 생겨났다 부서지는 건물들… 아직 살아 있네 울부짖는 땅콩들.’(‘외로운 꽃잎들이 만나 나비가 되었네’) 크라잉넛은 산불에도 타지 않고 병충해도 견뎌냈다. 건물은 부서지면 끝이지만 인물은 부서져서 거듭난다. 눈 비비고 보라. 낡은 가구는 교체되지만 늙은 나무는 숲을 지킨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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