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서재

도넛 가게에 들렀지. 도넛을 사는 기분을 느끼려고 말이지. 도넛. 밀가루에 베이킹파우더, 설탕, 달걀 따위를 섞어 이겨서 경단이나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기름에 튀긴 과자. 도넛은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도 좋겠잖아. 그렇잖아. 이 도넛이 네 도넛이냐 제각각의 향을 입은 다디단 동그라미 가운데 집게로 내 도넛을 가려내고 집어내어 쟁반에 올려놓을 적에 변하지 않는 건 정(情)이기에 앞서 내 고심이 곧 내 취향이구나 그 재미야말로 곧 동심(童心)이구나 알 적에 도넛이 든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내 동작은 그야말로 조심조심. 신형철 평론가가 그의 책 ‘인생의 역사’에서 그랬지. 조심은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이라고.

봉투에서 도넛을 꺼냈지. 그리고 잠시 두고 가만히 보았지. 도넛을 두고 이 도넛을 어떻게 시작할까 뜸을 들이는 건 도넛을 에워싼 설탕 가루 때문만은 아니지. 떨어져 쌓이는 까슬까슬 흰 가루가 짠맛도 아닌 것을 쓴맛도 아닌 것을 하물며 단맛인 것을! 힌트라면 책이랄까. ‘도넛을 나누는 기분’이라 하니 어떻게 도넛을 먹을까 하는 마음은 어떻게 도넛을 나눌까 하는 기분이지 않을까 하여 “나란히 시선을 두는 것뿐이다/반절만 건네고. 반절은 물고”라 쓴 유희경 시인의 글을 찾아 읽었지. “시를 쓴다는 것, 또 시를 읽는다는 것 역시 기분의 문제이다. 나는 당신의 기분을 침범할 수 없다. 당신이 나의 기분에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도넛을 먹으며 시집을 읽었지. 며칠 이 시집이 가방 속에 들어 있어 그토록 도넛 타령이었구나. 내 킁킁거림의 근원을 알게 한 이 책은 창비청소년시선 시리즈 10주년이자 50번 기념 시집이지. 20명의 시인이 저마다 청소년이라는 ‘시절’을 위시해 써내려간 시 3편과 시작 노트를 모았으니 시가 60편에 시작 노트가 20편이라 도합 80편의 읽을거리라 할 수 있지. 풍성하지. 이쁘지. 구절에 붙들리면 멈추고 구절이 놔주면 뛰어가고 일단은 다양한 입맛이라 할 메뉴라서 골라 먹기 좋으니까 중학교 3학년 남자 조카에게 망설임 없이 선물로도 보낼 수 있었지. 원휘야, 이게 ‘거북이의 세계’란다. “앞을 밀며/앞을 밀며//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바다는 끝이 없으니까/백 년 동안//앞을 밀며/앞을 밀며//나아가도 제자리//안도 밖도 없이”(유계영). 이모, 거북이 사셨어요? 얘는, 초심(初心) 그거 마음을 잘 먹자는 얘기지.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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