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한 분야 정통한 사람 일컬어
오로지‘專’써서 전문가 지칭
하지만 하나만 꿰뚫어선 안돼

모든 대상에 ‘사람’이 있어야
전문성 갖추되 사람을 향하는
‘스페셜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전문가. 사전에서 이 말을 찾아보면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나와 있다. 한자로 전문가는 ‘專門家’로 쓴다. 나는 ‘오로지 전’ 자(字)를 주목한다. 내친김에 ‘전(專)’ 자가 들어간 다른 말도 찾아본다. 전업(專業).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나 사업이라는 뜻이며, 한 가지 일이나 직업에 전념하여 일한다는 뜻도 있다. 이 한자가 들어간 말엔 ‘전속(專屬)’도 있다. 오로지 어떤 한 기구나 조직에 소속되거나 관계를 맺음이라는 뜻이고, 권리나 의무가 오직 특정한 사람이나 기관에 딸림이라는 뜻임을 확인한다.

이 ‘專’자가 들어간 여러 단어를 찾아보며 ‘오로지’와 ‘오직’이라는 말의 배타성을 확인한다. ‘오로지’나 ‘오직’은 수많은 대상 중 극히 일부만 품고 나머지는 배제한다. 오직과 오로지의 대상이 되는 일이나 분야, 사람은 극진한 노력과 애정을 받지만 나머지는 관심과 수고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전문가를 떠올릴 때마다 한계가 느껴졌던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전문가의 관심 영역 밖, 그 나머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오로지 그것 하나에만 관심을 두고 집중하니까.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죽자사자 그것만 파고들어도 충분치 않다. 이것저것 죄다 들여다봐서는 깊어지기도 통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세상사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한 분야만 꿰뚫어서는 문제 해결이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스페셜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형용 모순적인 이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하는데, 전문가의 관심 대상에 사람이 빠져 있다고 느낄 때 특히 그렇다.

10여 년 전 갱년기 증상으로 심하게 고생한 적이 있다. 얼굴이 벌게지고 체온조절이 잘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 군데 심한 통증이 있었다. 웬만해선 병원에 가지 않는 편이지만, 결국 산부인과를 찾았다. 담당 의사는 갱년기 여성 호르몬 치료의 권위자였는데, 환자인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검사 결과가 띄워진 모니터만 볼 뿐 내 얼굴은 보지도, 살피지도 않았다. 환자의 얼굴이나 컨디션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데이터일 것 같은데 그의 눈은 모니터에서 떨어질 줄 몰랐고, 그는 그 데이터에 근거해 처방했다. 그는 오로지 호르몬에 집중할 뿐 환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듯했다.



지난해 여름부터 또다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번엔 동생의 보호자로서 정기적으로 의사 앞에 섰다. 동생은 암이었다. 그때 암 진단을 받고 항암을 시작한 뒤 3주마다 CT를 찍으면서 변화를 살폈다. 첫 번째 CT 결과를 보는 날. 초조하고 떨리는 우리에게 의사는 암세포가 드라마틱하게 줄었다는 ‘복음’을 전했다. 그의 말이 안긴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CT를 찍었고 그때마다 검사 결과는 아주 좋았다. 장기의 암세포는 확 줄었고 지난 연말엔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들었으니 마음을 놓아도 되겠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동생의 실제 상태는 검사 결과와는 영 딴판이었다. 처음에 동생은 자기 발로 걸어서 진료실에 들어갔으나 그다음엔 휠체어에 앉아야 했고, 그다음엔 다리를 들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졌다. 왼발 부위 암세포가 줄었다는 검사 결과와는 달리 동생의 몸과 컨디션은 줄기차게 나빠졌고,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는 다른 증상들이 계속해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환자가 실제로 겪고 있는 증상들을 의사는 별로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므로 속속 나타나는 다른 증상들은 보호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해법을 찾아야 했다. 물론, 의료대란으로 다른 진료과와의 협진이 원활치 못한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료를 보고 나올 때마다 내 머릿속엔 이 생각이 떠올랐다. 병을 고치는 일과 환자를 고치는 일이 항상 동의어인 건 아니라는.

2022년에 출간된 책 ‘모든 것은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도서관은 책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핀란드 탐페레중앙도서관 관장의 말인데 나는 이 문장이야말로 전문가들이 새겨야 할 중대한 통찰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도서관은 장서를 갖춘 곳이므로 사서 등 도서관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책의 전문가로 한정하기 쉽다. 하지만 도서관은 왜 책을 구비하는가? 도서관은 왜 존재하는가? 결국은 사람. 그 책을 읽을 사람을 핵심에 놓아야 한다.

탐페레중앙도서관장의 이야기에서 보듯 전문가의 모든 노력과 행위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그런 노력과 수고를 들이는지 허탈해지기 쉽다.

동생은 끝내 기대하던 치료 결과를 얻진 못했다. 그런데도 좋은 항암제를 찾아주고 애써준 주치의께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다만, 작년 여름과 가을, 겨울에 걸쳐 그의 진료를 받으면서 전문가의 한계 또한 본 것 같다. 제 일을 지극히 작은 한 부분으로 한정하고 그 안에 들어앉아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을 두고 들여다본 한계 말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무릇 전문가란 자기 전문 분야를 갖되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향하는 스페셜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그래야 그가 가진 전문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대로 쓰일 테니 말이다.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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