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다흠
ⓒ 백다흠


■ 번역가 홍한별, ‘흰 고래…’ 펴내

소쉬르·데리다 사상 넘나들며
번역 둘러싼 다양한 논점 살펴


2024년 누적판매 14만 부를 넘으며 돌풍을 일으켰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번역가 홍한별(사진). 가즈오 이시구로, 수전 손택, 버지니아 울프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그동안 내놓은 단행본이 줄잡아 100권을 넘는다. 2020년엔 애나 번스의 ‘밀크맨’으로 유영번역상도 수상했다. 올해로 23년 차 베테랑 번역가인 그가 이번엔 직접 자신의 에세이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위고)를 펴냈다. 홍 번역가는 최근 문화일보와 만나 “번역은 매 순간 몸을 바꾸는 일이기에 단 한 줄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책의 제목이 된 ‘흰 고래의 흼’이라는 표현 자체가 번역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흰 고래는 허먼 멜빌의 소설에 등장하는 ‘모비 딕’이다. 홍 번역가는 번역자의 관점에서 모비 딕을 다시 읽는다. 대자연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사투를 보는 게 아니라, 닿을 수 없는 존재에 닿으려다가 맞닥뜨리는 인간의 실패로 해석한다. 연필로 칠하면 칠할수록 시커먼 덩어리로 남아버려 끝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번역의 고단함을 발견한 것이다. “성경에는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바벨탑에 분노한 하나님이 민족의 언어를 다르게 만드는 형벌을 내렸다고 적혀 있어요. 언어를 다시 잇는 번역은 신에게 도전하고 실패하는 일일 수 있죠.”

책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부터 발터 벤야민과 자크 데리다를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번역을 둘러싼 다양한 논점을 살핀다. 먼저 오랜 시간 동안 합의하지 못했던 직역과 의역이다. 홍 번역가는 챕터마다 직역과 의역 모두의 장단점을 예시로 보여주며 하나의 바람직한 방법론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제가 박쥐처럼 직역과 의역을 왔다 갔다 했어요. 사실 옳은 번역이란 작업마다 바뀌니까 번역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충분해요. 직역과 의역을 넘어서 인간적인 번역이 중요한 시대예요.”

대학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는 홍 번역가는 “최근에는 인공지능(AI) 번역이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라고 했다. 책에도 AI 번역과 본인의 번역을 비교하는 부분이 단연 눈에 띈다. 과연 AI의 공습에도 번역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좋은 번역은 투명한 번역이고, 투명하다는 건 이 책이 번역됐다는 걸 독자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읽어내는 걸 뜻해요. 결국 원서에서 사용된 단어를 그대로 직역하는 AI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해 원서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번역이 필요합니다. 그게 인간적인 번역이에요.”

홍 번역가는 번역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환영한다. “번역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사람들이 관심을 더 많이 가지게 되는 일”이 흐뭇하기 때문이다. 막힘 없이 술술 읽히는 번역이 투명하고 좋은 번역인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번역가의 역할이 저평가되는 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번역이 오롯이 홀로 설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독자들은 책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번역의 문제라고 말씀하시곤 해요. 그렇다면 책이 좋을 때, 번역가도 조금은 칭찬해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상금처럼 반반까지는 아니더라도요.”(웃음)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장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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