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영양 가보니…

군민회관에 이재민만 수백명
“119 전화할 시간조차 없었다”


영양=노지운 기자 erased@munhwa.com

지난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한 불이 강풍을 타고 영양·영덕·포항까지 번지면서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의 ‘탈출 러시’가 벌어졌다. 이곳 주민들은 산불이 순식간에 마을을 삼키면서 구급대원을 기다릴 틈도 없이 이웃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고 입을 모았다.

26일 오전 9시쯤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임시 대피소 영양군민회관에는 500여 명의 이재민으로 가득 찼다. 은색 돗자리를 깔고 누운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모여 앉아 있었다. “집이 다 타버렸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냐” 등 탄식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영양읍 주민 이모(75) 씨는 “전날 오후 6시쯤 대피 문자가 와서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산에 있던 불씨가 마당과 집 안까지 쏜살같이 날아와 번졌다”며 “살면서 처음 본 광경에 너무 무서워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피해 마을 대부분이 산골에 위치해 있고 강풍에 워낙 빠르게 불길이 번지면서 119에 신고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영양읍 서부리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주민 안명옥(74) 씨는 “창문 너머로 산불이 빠르게 내려오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차도 없어 대피할 방법이 막막했다”며 “마침 마을 사람이 와서 같이 대피한 덕에 겨우 나올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불길에 갇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영양군에서는 삼의리 이장 부부와 이장의 처남 부부 4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장 부부는 근처에 살고 있는 처남 부부의 대피를 도와주기 위해 들판에 놓인 처남댁 농기계를 창고에 넣고 뒤늦게 피난길에 오르다 봉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장 부부와 이웃이라는 삼의리 주민 이인순(73) 씨는 “부부 둘 다 우리 동네에서 소문난 일꾼이고 정말 착실한 사람들이었다. 너무 슬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산불로 도로가 차단되고 통신이 끊겨 주민들이 고립되는 일도 벌어졌다. 전날 안동시 임하면에서는 피난 차량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강풍이 불었는데, 불길이 도로까지 번지고 통신마저 끊기면서 주민 5명이 차량 안에서 2시간 가까이 고립됐다. 또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에서는 한 요양원 직원과 입소자가 차를 타고 대피하던 중 화염에 휩싸여 차가 폭발해 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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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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