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불에 가족 잃은 사람들
“여긴 괜찮다”던 영덕 노부부
부둥켜안은 채 시신으로 발견
해안 석리마을까지 화마 번져
주택 5~6채 남고 모두 폐허로
영양서 대피소로 피한 노인들
“기침 끊이지 않아…심장 떨려”
영양=노지운·영덕=이재희 기자
“재난문자가 왔을 땐 이미 불이 집 앞마당까지 내려온 상태였어요. 아내를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27일 오전 경북 영양군 임시대피소 영양군민회관에서 만난 남병희(71) 씨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25일 오후 6시쯤 대피 문자가 도착했을 때,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에 위치한 그의 집은 이미 연기가 사방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집 앞마당과 차, 트랙터 등에 산불이 옮아붙은 탓이었다. 단전으로 칠흑같이 어두웠던 집에서 남 씨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했지만, 아내는 미처 나오지 못했다. 남 씨는 “연기가 사방에서 들어오고 아무것도 안 보이니 일단 탈출해 아내가 나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는데 집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탔다. 같이 나오지 못한 게 한”이라며 울먹였다. 25일부터 이날까지 영양군에서 산불로 사망한 사람은 6명이다.
경북 영덕군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모(90)·권모(87) 씨 부부 빈소에서도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막내딸 이모(55) 씨는 “아버지가 괜찮다고 했는데…, 엄마랑 마지막 통화를 못 했어”라며 가슴을 치고 울었다. 이 씨 부부는 26일 오전 4시 40분쯤 자택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곳에 불이 난 건 전날(25일) 오후 9시 반쯤으로, 불과 한 시간 전 부부는 딸·며느리와 전화하며 “여긴 괜찮다”고 안심시켰지만, 순식간에 화마가 덮쳤다. 둘째 아들 부부가 차 지붕에 불이 붙었는데도 화염을 뚫고 부모님을 찾으러 갔을 때 부부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숨져 있었다.
바닷가 작은 어촌이던 영덕군 영덕읍 석리마을은 산불로 쑥대밭이 됐다. 이날 오전 찾은 석리마을은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마을은 집들이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인 모양이 따개비 같아 경관이 아름답던 곳이지만, 풍비박산이 나는 데는 단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숲과 밭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고 새카맣게 탄 재만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뼈대만 까맣게 남은 비닐하우스 아래 갈 곳을 잃은 소들이 불길에 그을린 채 구슬프게 울었다. 이 마을엔 100여 가구가 있었지만, 주택 대여섯 채를 남기고 모두 폐허가 됐다. 주민 이모(63) 씨는 “바람이 토네이도처럼 불어 슬레이트 지붕이 뜯겨 올라갔다가 눈앞에 쾅 하고 떨어졌고, 차가 장난감처럼 날아갔다”며 “대피하란 이야기를 듣고 몸만 겨우 챙겨 나왔는데 5분 만에 불똥이 마구 튀면서 삽시간에 지옥불처럼 시뻘겋게 타올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사람들은 이어지는 극도의 불안감으로 피난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틀 동안 연이은 대피령에 주민들이 몰리며 군민회관과 영양중·고등학교 등 대피소는 포화상태였다. 대부분 고령의 노인인 데다 매캐한 산불 연기가 영양 일대를 뒤덮어, 대피소 곳곳에서는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성은(68) 씨는 “원래도 기관지가 좋지 않았는데 이틀 연속 연기를 맡다 보니 기침이 끊이지 않아 잠도 설쳤다”며 “어딜 가든 냄새가 진동하니 머리도 아프고 속도 매스껍다”고 말했다. 정모(76) 씨도 “자리도 불편하고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려 1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며 “집이고 뭐고 다 탔다. 비라도 와야 하는데 비 소식도 없으니 정말 야속하다”고 토로했다. 영양군에 따르면 26일 오후 기준 약 1900명의 주민이 대피소로 대피했다.
대피소엔 텐트도 모자라, 90살 이상 고령자와 부상자만 텐트 안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나머지 주민들은 맨바닥에 깐 은박지 위에서 옆 사람과 어깨를 맞대고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의자 위에서 쪽잠을 청하는 주민들도 있었다. 이재민 황기표(78) 씨는 “불길이 우리 집까지 닥칠까봐 걱정이고 잠자리도 불편해 통 잠을 못 잤다”고 말했다. 열악한 환경 탓에 일부 주민은 대피소를 다시 떠나기도 했다. 한 주민은 “일단 대피하라고 해서 왔는데, 사람도 너무 많고 도저히 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라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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