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旅順)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날 형장으로 끌려 나온 안중근 의사는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연해주로 망명, 의병을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하던 중 동양평화의 파괴자며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哈爾濱)에서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꽃다운 생을 마감했다. 115년 전 이맘때였다. 관동도독부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고등법원장은 안 의사가 상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동양평화론’ 집필을 완성할 때까지 사형을 연기해 주겠다고 대답해 놓고는 일본 정부의 긴급 지령에 따라 서둘러 형을 집행했다.
재판도 심문-변호-구형-선고 등 형식적으로 일주일 만에 끝냈다. 또한, 공판 자체가 원인 무효다. 하얼빈은 제정러시아 조차(租借)지역이고, 적장을 총살한 국사범을 일본 형법으로 부당하게 재판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당일 아침 뤼순 감옥에서 공판정을 오갈 때 호송을 맡았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란 유묵을 써주었다. 군인의 사명감과 확고한 신념의 표시였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안 의사를 일본의 대륙 진출을 방해한 인물 또는 일본 근대화의 주역인 이토를 죽인 테러리스트, 즉 범법자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는 양국의 근대사가 극단적으로 충돌한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이토 처단은 개인의 원한 관계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 인식 차이가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를 기대하긴 요원하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꾸짖고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는 뤼순을 동북아의 중심지로 삼아 한국·일본·중국 세 나라가 자주독립국으로 힘을 합쳐 오늘날 유럽연합(EU)과 같은 지역 협력 체제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동북아 개발은행 설립과 공동 화폐 발행, 그리고 상비군을 창설해 구미 열강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것이었다. 동북아에서 강대국 간 패권 경쟁이 끊이지 않고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지속적 경제발전과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생전 안 의사가 주장했던 동북아 지역공동체 방안에 대한 철학과 사상을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중국은 최대 관광·교역국이고 일본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우방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활발히 논의 중인 한·일·중 경제 통합론이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정상화는 시사하는 바 크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결연한 실천 의지를 표현한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 등 200여 점의 보물 같은 유묵을 남기고 31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하루 전날 유언을 통해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이 되면 죽는 자 여한이 없으며, 대한독립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했다. 지나온 20세기의 험난한 독립운동사에서 상징적 대한국인을 꼽는다면 단연 동양평화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안 의사이다. 우리 후손들이 안 의사를 ‘불세출의 영웅’으로 칭송하며 열광하는 이유이다. 황해도 명문가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안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불꽃 같은 삶은 민족정기의 표상으로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