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전 경북 의성군 의성체육관 임시 대피소에서 한 구세군 자원봉사자가 셸터 안에서 쉬고 있는 이재민의 이부자리를 정리해주고 있다.  윤성호 기자
28일 오전 경북 의성군 의성체육관 임시 대피소에서 한 구세군 자원봉사자가 셸터 안에서 쉬고 있는 이재민의 이부자리를 정리해주고 있다. 윤성호 기자


■ 경북 산불현장 숨은 ‘이웃 영웅’

영덕 출신 권오삼·권기현 부자
대피 못한 노인 차에 태워 구출

유일하게 남은 하회마을 주민
“소방관 쉬라고 안방도 내줬다”
청년들은 직접 물 뿌리기 도와


영양=노지운·영덕=이재희 기자·안동=조언·의성=김린아 기자

역대 최악의 산불이 경북 일대를 덮친 가운데 피해 마을 곳곳에서는 이웃의 생명을 구하고 이재민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평범한 ‘영웅’들의 활약이 빛을 발하고 있다.

경북 영덕군 지품면 원전리에 화마가 덮친 지난 25일 권 씨 부자(父子)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 이웃 5명을 대피시켜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이날 오후 6시 30분쯤 원전리에서 15㎞ 정도 떨어진 파천면에 산불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마을 뒷산에서는 시뻘건 불기둥이 내려앉고 불붙은 나뭇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주민인 권기현(38) 씨는 자동차를 끌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이웃들에게 “불이 코앞까지 왔으니 어서 대피하라”고 외쳤다. 같은 시간 아버지 권오삼(70) 씨도 차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며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고령의 노인들을 끝까지 찾았다. 그러던 중 망연자실해 있는 할머니 5명을 태우고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했다. 28일 영덕국민체육센터 임시 대피소에서 만난 아버지 권 씨는 “불이 차 뒤꽁무니를 쫓아와 시속 70㎞로 달렸다”며 “연기가 자욱해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도로에 바람이 얼마나 센지 차가 들썩거릴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권 씨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한 오순자(83) 씨는 “그때 이 사람 차 안 탔으면 죽을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름 모를 이웃 마을 주민 덕에 목숨을 구한 사례도 있었다. 안동 지역 이재민 임순희(75) 씨는 “마당과 집이 불타고 있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어떤 젊은 남자가 차를 끌고 나타나 ‘어르신 얼른 타세요’라고 외쳐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올라탔다”며 “상황이 급박해 이름도 못 물어보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했다. 생명의 은인이다”고 말했다.

한때 3㎞ 앞까지 불길이 몰려왔던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거주민 중 유일하게 남은 류상익(47) 씨는 이날 오전 400년 된 보호수 ‘만세송’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풍산 류씨 겸암공파 29대손이라는 그는 “하회마을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소중한 유산으로, 이곳을 지키는 게 주민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며 “이곳 소방관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집 안방도 내줬다”고 말했다. 전날 하회마을에서는 지역 청년들로 구성된 ‘안동행복드림’ 회원 10여 명이 자정까지 마을 곳곳에 물을 뿌리는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이재민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손발을 걷어붙인 시민들도 있다. 이날 영양군민회관에서는 지역 자원봉사자들이 4일째 이재민들과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이옥하 영양군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은 “화재 발생 첫날 밤부터 회원들과 대피소로 달려와 이재민들이 잠을 잘 수 있도록 준비하고 같이 밤을 새웠다”며 “이재민 상당수가 제 이웃이고 아는 어르신들이다. 이분들이 고령인 만큼 거동할 때 일대일로 붙어 부축하고 식사 준비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생계를 잠시 접어두고 이재민 돕기에 나선 자영업자들도 있다. 영양군민회관 앞에 푸드트럭을 연 최민우(53)·석유진(60) 씨 부부는 이재민들에게 붕어빵 1000개와 어묵 3000개를 무료로 제공했다. 최 씨는 “이재민들 대부분이 제 손님이고 이웃이다. 열심히 산다고 항상 격려해주셨던 분들인데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이재민들에게 숙소를 무료 개방한 안동 시내 숙박업소 사장 김모(58) 씨는 “전 주민 대피령이 떨어지고 남성 두 명이 고령의 할머니를 모시고 오고, 젊은 부부가 아이와 함께 대피하러 왔었다”며 “이럴 때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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