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범 산업부장

기업인 형벌 조항만 6581개
美 재계조차 비관세 장벽 지목
상법 개정, 상호관세 빌미 줄 것

국내 기업 8년 대미 투자 203兆
향후 투자는 광역시 세울 정도
거부권 행사 않으면 경제 수렁


‘툭 하면 법 위반이라고 경영자를 처벌하는데, 차라리 해외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정국도 불안한데 기업 잡겠다는 법안만 수두룩하다. 다른 나라는 기업 키운다고 난리인데, 왜 기업을 잡아먹지 못해 난리인가’. 요즘 기업인을 만나면 자주 듣는 얘기다. 기업을 일으켜 국가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으로 대변돼 온 기업가 정신이 요즘처럼 바닥까지 떨어진 적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전쟁의 칼을 휘두르고, 한국 정부는 국정 공백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로키(낮은 목소리) 전략’으로 포장하고, 정치권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미래 투자를 가로막는 상법 개정 같은 각종 규제를 남발한다.

이번 관세 전쟁은 한국 기업이 처한 현실을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틀 뒤면 각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하고, 사흘 뒤면 자동차 관세를 부과할 작정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비관세 장벽을 문제 삼아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큰데, 대표적인 비관세 장벽 중 하나로 기업 규제가 지목되고 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가 최근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교역 상대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 의견서에 따르면 한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인 상당수는 각종 규제 위반 등을 이유로 한국에서 징역형이나 출국금지, 국정감사 출석 등과 같은 처우를 당했는데, 다른 선진국에선 겪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미국상의는 이에 대해 “다른 선진국은 대부분 민사의 문제로 취급하는데, 한국은 정치적 동기로 기업인에 대한 과도한 형사처벌을 추진하곤 한다”며 국제 무역 질서와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 관련 법률은 기업인을 대상으로 한 형사 처분 조항이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강도도 못잖게 세다. 2022년 당시 한국경제인협회가 16개 부처 소관 법률 721개 가운데 기업 활동과 관련이 높은 법률 301개를 선정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관련 법률 중 형벌 조항을 두고 있는 항목은 6581개에 달했다. 행위자와 법인을 동시에 처벌하는 양벌규정을 두는 조항은 91.9%에 해당하는 6047개, 형벌과 징벌적 손해배상을 중복해서 명시한 조항은 170개였다. 이뿐 아니다. 징역형의 상한을 두지 않는 조항 수는 225개에 이르고 징역과 벌금, 과징금 등으로 삼중 처벌을 규정한 조항 수는 580개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반(反)경쟁’ 행위에 대한 처벌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유럽은 과징금으로, 미국은 형벌로 각각 제재하는데, 한국은 형벌과 과징금 모두로 이중 처벌을 한다. 3년 전 분석한 결과이니 지금은 더 심하면 심해졌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22대 국회 들어 발의된 규제 법안은 21대 때보다 10여% 늘어난 반면, 지원 법안은 반대로 그 이상 줄어든 상황이다.

노조에 기울어진 노동 규제도 대표적인 사례다. 오죽하면 불법 파견 혐의로 기소돼 출국금지를 당했던 카허 카젬 전 한국GM 사장이 GM상하이자동차로 자리를 옮긴 뒤 “한국에선 노사문제 대응이 업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중국에선 그런 일이 없어 경영에 전념할 수 있었다”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겠는가. 트럼프 행정부가 자동차 25% 관세 부과까지 강행하면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본사는 한국 생산기지를 더는 유지할 이유를 찾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한국GM은 지난해 42만 대를 생산해 미국에 수출했는데, 현대차그룹 미국 수출 물량(64만 대)과 비교하면 66%에 달한다.

지난 13일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이 현실화하면 기업가 정신은 산불이 지나간 자리처럼 황폐해질 것이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은 중국 같은 사회주의에 뿌리를 둔 일부 국가에나 통용되는 개념이다. 단기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중장기 투자 전략은 엄두도 낼 수 없게 만들고, 기업과 자본의 해외 유출은 심해질 것이다.

한국이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미국에 투자한 금액은 203조 원이다. 국내 기업이 미국에 짓고 있는 공장 규모를 경제 효과로 환산하면 우리나라에 광역시를 세울 정도라는 얘기도 나온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개정 상법의 재의 요구를 해야 한다. 더 이상 기업을 내쫓아선 안 된다.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산업부장
이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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