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철환의 음악동네 - 김정미 ‘봄’
봄은 오지 말래도 온다. ‘봄이 왔네. 봄이 와’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의 제목은 ‘봄’이 아니라 ‘처녀 총각’(1934)이다. 원곡 가수(강홍식)의 노래를 찾아서 들어보니 가사가 한 글자(‘봄은 왔네’) 다르다. 봄이 오는 건 단순 미래다. 그에 반해 봄은 온다는 (믿음은) 의지 미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이런 시는 없다. 1926년에 이상화(당시 25세)가 쓴 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다.
봄은 가지 말래도 간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알뜰한 그 맹세’(1953·백설희 ‘봄날은 간다’). 봄을 잡을 수 없듯이 음악도 가둬놓을 수 없다. 노래채집가는 노래를 잡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에 잡힌 사람이다. 곤충 잡는 그물을 포충망(捕蟲網)이라고 하는데 채집가는 그것으로 아무 벌레나 잡지 않는다. 나를 사로잡은 노래를 내가 잡은 것이므로 그 둘은 맹세하지 않았을 뿐 그 순간부터 동거에 들어가는 것이다. 채집(구금?) 당한 노래 중 일부는 박제로 남거나 못 견뎌 탈출한다.
연애편지 써놓고 부치지 않으면 그건 고문서에 불과하다. 나의 출석부(플레이리스트)엔 졸업을 유예한 노래들이 부지기수다. 내가 부르면(고르면) 당장이라도 답을 한다. 오랫동안 안 부르면 소멸이지만 계속 부르면 불멸이다. 불사조가 된 노래들은 시간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의 터전은 시간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정훈희 ‘안개’) 가수 김정미는 내게 안개 같은 사람이다. 살아생전 이분을 만날 수 있을까.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런데 안개 속을 걷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안개가 걷히니 여기저기서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안개’ 1절)을 여실히 드러낸다. ‘안개 속에 눈을 떠라’(‘안개’ 2절) 그렇게 해준 건 고맙게도 한 편의 드라마(‘폭싹 속았수다’·사진)다.
PD라는 직업은 그렇게 부르건 안 부르건 상당수 노래채집가다. 작품 곳곳에 어울리는 노래를 최종결정하는 게 PD의 권리이자 책무다. 음악감독이 선곡하고 작가가 추천해도 기각할 권한이 PD에겐 있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생애를 관통하는 노래들로 점철(흐트러진 점들이 서로 이어졌다는 뜻)된 이 드라마의 연출자(김원석)는 놀랍게도 김정미의 ‘봄’을 주제가로 선정했다. 연보를 보니 김 PD가 태어난 해(1971)에 가수 김정미는 데뷔했고 김 PD가 ‘강보에 싸인 아이’일 때(1973) 이 노래(‘봄’)는 탄생했다.
어떤 드라마들에선 주인공이 빗속을 하염없이 걷는 장면이 무척이나 길게 나오곤 하는데 거기엔 어김없이 음악(OST)이 진하게 깔린다. 저렇게 오래 음악을 틀어주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 물었더니 어이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계약서대로 하는 거죠’ 그러니까 제작비 충당에 음악이 퐁당 빠진 격이다. 한도 초과한 낭만(?)이 계약을 이행하라는 조항에서 비롯됐다니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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