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상담소
▶▶ 독자 고민
성폭행을 당한 지 5년 가까이 됐습니다. 당시에는 어리기도 했고, 가해자가 취업이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신고하지 못했습니다. 길 가다 칼로 협박당한 것도 아닌데 제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고요.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제가 연애도 어렵고, 회사 남자 동료들 말에도 예민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삶이 망가진 것 같아 최근 부모님께 털어놨더니 이제 와서 신고하면 제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염려하시니 더 이상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더라고요. 가해자는 잘살고 있는 게 눈에 보이고, 저는 점점 우울해지고 이렇게 오래 전 사건으로 힘들어 하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A : 자기 탓에서 벗어나 ‘내 행복·존엄’을 먼저 생각해야
▶▶ 솔루션
오랜 시간 마음이 너무 힘드셨겠네요. 성범죄에 대한 전통적 인식 때문에 다들 자기 탓을 하기 쉽습니다. 전체적인 성범죄 건수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디지털성범죄, 그루밍 성범죄 등 양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생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은 당장 물리적 협박뿐 아니라, 미래나 사회적 역할을 위협받는 상황을 포함합니다. 사회적인 압박과 심리적 지배도 물리적 협박 못지않은데, 자책하는 피해자들이 많습니다. 혹시 나도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심한 트라우마를 당하면 기억만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자꾸 그 일을 예방할 수 있었던 요인을 찾아보게 됩니다. 앞으로 그런 끔찍한 일을 겪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오히려 피해자가 자기 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반성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심리적 압박감에 의해 저항이 어려웠던 트라우마에 대해 내 탓을 한다면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원래 아는 사람끼리 성범죄는 언어적 조종이 흔합니다. 가해자들은 종종 “잊어라” “너 때문에 그런 거야”와 같은 표현을 하거나 사랑을 빙자하면서 피해자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런 조종 때문에 심지어 가해자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피해자도 있습니다. 자책의 수렁에서 벗어난 후, 다음을 생각해보는 게 좋습니다.
내가 겪은 일을 자기 친구의 일이라고 한번 생각해보면 도움됩니다. 예를 들어, 소중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이런 일을 겪었다고 했을 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하주원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홍보이사·전문의
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