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제대결 그린 영화 ‘승부’ 실제 주인공 조훈현 국수

“이창호에 타이틀 빼앗기며
대견하면서도 마음은 착잡

바둑도 AI 수용해야하지만
예와 도 사라지는게 아쉬워”


“영화가 화제가 되니까 바둑에 대해 알고 싶다는 사람들이 좀 생겼다고 해요. 바둑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다행이지요.”

영화 ‘승부’의 실제 주인공 조훈현(72·사진) 국수는 6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아주 재밌게 잘 봤다”며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승부’는 지난달 26일 개봉 후 연일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 영화는 조 국수와 바둑 천재 이창호 9단의 사제 대결을 그린 작품으로 이병헌, 유아인 배우가 각각 주인공을 맡았다.

“처음에 이 얘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바둑이 무슨 액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면적인 것인데 걱정이 많았지요. 그런데 주연들의 연기가 정말 기가 막혔어요. 이병헌 배우가 연구를 많이 했더라고요. 흡사하게 잘 그려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조 국수는 1984년 이창호 9단이 아홉 살 때 내제자(內弟子·스승과 함께 살며 배우는 제자)로 받아들였다. “창호는 좀 특별한 스타일이지요. 천재는 보통 눈에 보이는 법인데 처음엔 그렇지 않았어요. 몇 시간 동안 미동도 않고 바둑판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어른도 힘든 일인데 좀 남달랐지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계산 같은 것을 잘했고, 그건 머릿속에 있으니 겉으로는 안 나타난 것이지요. 제가 뭘 크게 가르쳤다기보다는 자기 길을 잘 갈 수 있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줬을 뿐이에요. 사실 본인 스스로 깨닫고 공부해서 크는 것이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당시 조 국수는 한국 바둑의 1인자였다. 1982년 29세에 한국인 최초로 9단에 올라 국내 기전을 전부 석권하는 전관왕을 세 번이나 차지했다. 훗날엔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바둑황제로 군림했다. 1990년 2월, 15세의 어린 제자는 최고위전에서 스승을 꺾었다. 이후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둘 빼앗았고, 1995년 조 국수는 무관(無冠)으로 전락하는 쓴맛을 봐야 했다. “복잡한 마음이었지요.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면은 아프잖아요. 그나마 다른 사람보다는 제자한테 내어주는 것이 낫지요.”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1998년 국수전에서 도전자로 나서 이창호 9단을 꺾고 다시 정상에 올랐다.

“무엇을 해도 안 된다고 느낄 때 거기서 다 좌절하고 꺾이는 것 같아요. 버텨야 되거든요. 열심히 하다 보면 또 살길이 나와요. 죽을 힘을 다해서 해보고 포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조훈현 국수가 1989년 9월 제1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우승 후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조훈현 국수가 1989년 9월 제1회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우승 후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세계 최연소인 9세에 프로기사로 입단해 60년 넘게 바둑 인생을 살아온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1989년 응씨배 우승을 꼽았다. 한국이 바둑 변방이었던 때 중국의 녜웨이핑을 꺾고 초대 우승자가 된 그는 바둑 영웅으로 떠올랐다. 금의환향해 김포공항에서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고, 국내에는 바둑 붐이 일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 바둑을 세계에 알리게 됐으니 감회가 깊지요. 후배들이 잘해주고 있는데 세계 1위를 놓치지 않고 유지해주면 좋겠어요. 승부의 세계에서 2등은 알아주지 않으니까요.”

그는 바둑 인공지능(AI)이 보편화 돼 프로 기사들도 AI에게 배우는 현 세태에 대해 시대의 변화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거기에 맞게 사람이 바뀌어야지요. 다만 예(禮)와 도(道), 그런 것들이 사라져 가는 게 아쉬운 마음입니다.”

‘전신(戰神·전투의 신)’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조 국수는 요즘은 주변의 특별한 요청에 의한 대국 외에는 바둑을 거의 두지 않는다고 했다. “달리기로 치면 세계 기록 9초, 10초대로 뛴 건데 지금은 20초 뛰라 해도 못 뛰어요. 나이에 맞게 살아야지요. 제 좌우명이 ‘무심(無心)’이에요. 무슨 일이든 욕심 때문에 탈이 난다고 생각해요. 욕심을 내지 않고 정확히 상황을 바라봐야 되거든요. 어렵지만 바둑둘 때도 그러려고 노력했고, 인생도 사심 없이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잠시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그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요즘 한국 정치 상황이 안타깝다고 했다. “너무 갈라져 있어요. 바둑도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잖아요. 흑백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수담(手談)이라고 하는 바둑 안에도 타협이 있듯 정치에서도 서로 타협하고 국민을 위해서 좋은 길을 찾아 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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