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데스크가 만난 사람 - 배우 최불암
Q. 한국사회 혼란 극단적 경쟁서 초래… 휴머니즘 회복 절실한 시대
인정·배려 인본주의에 바탕
미디어, 제대로 작품 만들어야
AI시대에도 사람 뒷전은 안돼
식당서 로봇 보면 발로 차고파
우리 국민 ‘정화하는 힘’ 가져
바람직한 한국인상 보여줄 것
아파보니‘인생의 허무함’느껴
‘한국인의 밥상’ 후배에 물려줘
인터뷰=장재선 부국장(전임기자) jeijei@munhwa.com
정리 =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그는 음유시인이다. 시집을 즐겨 읽고, 술자리에서 시음(詩吟)을 좋아한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보내는 문자 메시지는 시의 울림을 주며, 그 속에 한참 머물게 한다. 더러 술자리를 함께한 문화일보 기자에게 설을 앞두고 보내온 문자의 한 대목. ‘구정이라도 신문은 쉬기가 어려울 것이라 짐작됩니다. 점점- 세월은 없어지는데…술잔 놓고 그냥 말할 것이 많고 속내를 보이고 싶은 느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불암’.
80대의 그가 직접 쓴 문자 메시지의 아취(雅趣)는 그의 청년 시절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1950년대 서울 명동에서 어머니(이명숙)가 열었던 주점 ‘은성’에서 만났던 시인들에 대한 기억이 평생을 따라다닌다고 했다.
“박봉우 시인이 돈 없이 와서 막걸리를 한잔 먹고 노래를 불러요. 울려고 내가 왔나, 웃으려고 내가 왔나…내가 배우가 되려고 그랬는지 그런 장면이 오래 남아요.”
최불암(85) 배우. 최근 서울 여의도 그의 자택 인근에서 두 차례 만났을 때 그는 “가난했던 시절의 꿈을 사랑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당대 문화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은성의 분위기가 암암히 그립다고 했다.
“박봉우가 나가면 교대하는 것처럼 천상병 시인이 들어오는데, 와이셔츠가 새까매. 그 양반이 시를 읊으면, 손님들 속에서 ‘이리 와, 한잔해’ 하는 소리가 나와. 내가 시인들은 왜 돈을 내고 술을 먹지 않느냐고 하니까, 어머니가 그래요. 저 양반들은 나부터 술잔을 주고 싶다고…. 그때 이후로 시인들은 왜 가난한가, 라는 의문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는 당시 만났던 여러 시인 중 김수영이 열 내는 것은 어쩐지 정이 가지 않았다고 했다. “워낙 기운도 세고, 잘 생기고… 그래서 질투를 했나봐, 허허.”
그는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세상이 달라진 걸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가난했던 시절에 서로를 보듬어주던 정서가 더욱 그립다고 했다.
“내가 살아보니까 꿈이 있으면 가난해도 괜찮아. 나는 큰 꿈은 없었지만, ‘연극이 잘됐으면’ ‘새로운 기획이 잘돼야지’ 하는 것들이 내 뒤통수를 때려줬던 거지. 꿈이 있어야 인생이 맛있어. 꿈이 밥이요, 글이요, 역사가 되는 거지.”
그는 AI 때문에 인간이 뒷전으로 밀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식당에서 사람 대신에 로봇이 음식을 나르는 것을 보면, “발로 차 버리고 싶더라”고 했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14년 넘게 진행해 왔던 교양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서 오는 10일 물러난다. 그는 “그동안 어떻게 국민 앞에 다가가 동화할 수 있을까, (내레이션) 문장 하나에도 신경을 쓰느라 참 고생했다”고 털어놨다. 이 프로그램에 애정이 많은 그가 바통을 후배에게 넘긴 직접 계기는 허리 협착증 탓이다. 매주 지역을 다니느라 차에서 몸을 구부리고 오래 앉아 있던 게 병을 만들었다. 두 번의 입원과 재활훈련을 거쳐서 많이 나았지만, 병상의 성찰을 통해 ‘이제 후배에게 자리를 넘길 때가 되었다’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호주가인 그는 이번에 반년을 금주했다. 이렇게 길게 술을 먹지 않은 것은 평생 처음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환해졌으나, 병 앞에서 허무를 느낀 듯했다. “아프나, 안 아프나, 아파서 죽으나, 또 고쳐서 사나, 다 그게 그거 아닌가.”
지난 2월 말 오랜 지인 신달자 시인(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프니, 최불암이 아무것도 아니더라.” 역시 병고에 시달린 바 있는 신 시인도 크게 공감하며 웃었다. “아파보니까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끼게 되더라. 신달자도 별수 없구나.”
MBC가 그의 배우 인생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특집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묻자, 그는 특유의 파~ 하는 웃음을 지었다. “친구 이름도 잊어버리는 나이에 내가 어떻게 정리를 잘할 수 있을지 막막해요.”

그는 TV 드라마 이전에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젊은 시절에 기계체조 선수를 하는 등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배우가 될 생각은 못 했다고 되돌아봤다.
“당시 배우는 우선 잘 생겨야 하는데 나는 거기서 빠지니까…. 연출이나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맞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연극을 만드는데, 노역을 하는 배우가 너무 마땅치 않아서 내가 이렇게 해봐라, 시범을 보였는데 선배들이 ‘너무 잘한다. 네가 해 봐라’해서….”
그는 나중에 TV 드라마 ‘수사반장’ ‘전원일기’ ‘제1공화국’ 등에서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역할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노역을 하다 보면, 나도 깜짝 놀랄 때가 있어. 내가 외할아버지와 조그마한 방에서 몇 년을 함께 살았거든. 그러니 그분의 때가 얼마나 묻었을 거야. 그 양반은 궁중의 악사셨는데, 그 이야기를 일절 안 하셨어. 추억을 내놓고 싶어 하지 않으셨어. 그 시절엔 광대라는 게 그런 존재였나봐.”
그의 부친(최철)은 해방 직후 인천에서 영화사(건설영화사)와 신문사(인천일보)를 운영한 유지였다. 그러나 35세였던 1948년 자신이 제작한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시 8세였다. ‘영한(英漢)’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을 때였다.
“내가 중학교 들어가는 날, 큰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불암(佛岩)’이라는 이름을 가져왔어요. 부처님 바위처럼 오래 살라는 뜻이지. 그걸 보고 불자(佛子)셨던 어머니가 무척 놀랐던 모양이야. 이 거룩한 이름을 내 아들에게 쓴다는 건 예의가 아니잖소. 어머니는 생전 내 이름을 한 번도 ‘불암아!’라고 불러보지 못했어요. 불암산 시비에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채…’라고 적혀 있는 게 그 때문이지.”
그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목소리가 젖었다. 지난번 신달자 시인과의 대화 때도 그랬다. 어린 시절에 외로움으로 혼자 눈물을 지은 적도 있었다고 돌아보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평생 일하시면서 내 불쏘시개가 되어주셨는데, 내 눈물을 저 하늘에서 이제라도 아시면 얼마나 아프실까.”
그에게 “부처 바위라는 이름값을 하느라 너무 애쓰고 사신 것 아니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은 나라 운동본부’라는 프로그램을 하며 그 좋아했던 담배를 끊은 것처럼 그는 매사에 절제하며 삶의 균형을 지켜왔다.
최 배우는 누가 자신의 연기 경력과 그 성취를 상찬하면 굳이 부인하진 않지만, 스스로 초드는 적이 없다. 그러나 방송이 오락을 넘어서 한국인의 인간성 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소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작년 공영방송 사장을 만난 저녁 자리에서도 의례적 덕담 대신 그 신념을 수차례 피력하는 걸 곁에서 들은 적이 있다.
“미래를 위해서 미디어들이 정신 차려서 잘 만들어주길 바라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뭔지 보여줘야지, 시청률 때문에 경쟁 사회를 부추기면 안 됩니다.”
그는 오늘날 한국의 혼란이 가정과 학교에서 경쟁만을 강조하며 도덕과 양심을 상실한 괴물 엘리트들을 만든 탓이라고 본다.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휴머니즘의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문화예술이 그 역할을 해 줘야 한다고 믿는다.
“전 세계적으로 극단적인 자본주의 모순이 드러나고 있어요. 세계 대통령이라는 미국의 트럼프가 그 부자(일론 머스크)와 세팅이 돼서 오로지 내 나라만 잘살면 된다며 우방국에도 돈 내놔라, 관세를 들이미는 무지막지한 세상이 돼 있어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 국민은 스스로 정화하기 위해 인본주의로 돌아갈 거예요. 돈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 인간을 중시하는 문화예술의 르네상스가 올 거예요. 방송을 하는 후배들은 그런 세상을 위해 좋은 작품을 만들며 바람직한 한국인상을 보여줘야 해요.”
그에게 한국 현대사 속에서 바람직한 한국인상을 보여준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자신이 연기했던 정주영 현대 창업자를 들었다. “정주영을 볼 때마다, 아, 진짜 한국인이라고 느꼈지. 강원 통천이 고향이라서인지 남과 북을 섞어 놓은 듯한 신체, 용기와 결단을 갖춘 정신. 저런 사람 몇만 있으면 대한민국이 세계를 이끄는 나라가 되겠다 싶었지.”
그의 눈이 먼 곳을 잠시 더듬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산업을 일궈 공동체를 살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화예술인들을 보듬어 준 거목에 대한 그리움이 거기 엿보였다.
45년째 초록우산 후원자役… 13년간 소년수형자 교화 도와
최불암 배우는 1981년부터 45년째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 홍보대사와 후원회장을 하고 있다. 초록우산의 임직원들이 그를 가족처럼 여기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여러 계기를 통해 느낀 바 있다.
그는 지난 2012년엔 사단법인 ‘제로캠프’를 만들어 학교 밖 청소년들, 특히 소년 수형자들을 예술로 교화하는 활동을 해 왔다. 아무것도 없는 ‘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담아 취약계층 아동·청소년을 세상의 행복과 연결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동지’인 손영민 제로캠프 사무국장(연극 제작자)은 “선생님께서 사재까지 넣어서 이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그 뜻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천소년교도소 협조를 얻어서 소년 수형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연극, 뮤지컬 무대를 수년째 만들어온 것은 그 때문이다.
“내 자식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서 다른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바치는 내가 위선자가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집사람도 나를 닮아가요, 허허.”
그의 아내 김민자(83) 배우는 청각장애 아동을 후원하는 ‘사랑의 달팽이’ 회장을 18년이나 맡았다. 지난달 25일 그와의 인터뷰를 마친 후 저녁 자리에서 만난 김 배우는 “최근 회장 자리에서는 물러났는데,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고 했다.
최 배우가 “내가 아픈 동안 아내가 1인 2역을 하며 고생했다”고 하자, 김 배우는 “약 챙겨드리는 것 등까지 하면 1인 5역이더라”며 웃었다. 그는 침묵하는 것으로 아내의 노고를 인정했다.
부부는 이날 저녁 자리를 함께한 김경란 아나운서(초록우산 홍보대사)가 연극무대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것을 격려했다. 김 아나운서는 자신을 연극무대로 이끌어 준 김민자 배우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선생님께서 연기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연기 활동을 하지 않은 김 배우는 “좋은 작품이 있으면 하고 싶지만, 그런 대본을 만나기가 쉽지 않더라”고 답했다.
부부는 젊은 시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연극 무대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나눴다. “연기라는 게 인간상을 만드는 작업이잖아. 휴머니즘을 되살리는 멋진 작품이 있다면 이 나이에도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장재선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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