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선 출마 선언 한 달 뒤인 2021년 7월 25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패가망신’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는 “대통령은 결국 패가망신하는 길이다. 결코 영광의 길이 아니다”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캠프 참모들은 그 표현 삭제를 요청했지만, 정작 후보 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은 참모들 만류에도 일주일 뒤 국민의힘 초선 의원 모임에서 “대통령 도전은 불행한 일이고 패가망신하는 일”이라고 했다.
소학 외편에는 명문대가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여 패가망신하는 이유들이 담겨 있다. 항상 모든 일에 아는 체하고 큰소리로 떠들며 옛사람들의 도덕을 배우려 들지 않는 사람,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면서 멀리하고, 자기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는 사람은 어느덧 몰락의 길을 가게 마련이라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이 지난 2년11개월간 답습해온 일이다.
윤 전 대통령은 여의도에선 보기 드문 벼락스타였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고건 전 총리 등 정치 초보들이 거친 정치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여의도를 떠났다. 반면, 윤 전 대통령은 내로라하는 정치 고수들을 상대로 판판이 이겼다. 국민의힘 입당은 자신과 갈등을 빚던 이준석 대표의 외출을 틈타 기습적으로 했다. 윤 전 대통령은 ‘킹메이커’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이끌던 선대위를 해체하고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듬해 3월 9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치 참여를 선언한 지 8개월여 만이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가 키워 올린 벼락 성공인데도, 윤 전 대통령은 그 모든 성취를 자신의 것으로 여긴 듯하다. 정치 고수들을 물리치고 홀로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자아도취는 독선과 불통으로 이어졌다. 고언을 하는 참모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대통령실에서 쫓겨났다. 대통령의 ‘대로’ ‘격노’ 보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직언과도 민심과도 멀어졌다.
국회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일은 재임 기간에도 잦았다. ‘여의도 문법’에서 탈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상적인 정치 문법도 거부했다. 민주화 이후 처음 국회 개원식에 불참하는가 하면, 예산안 시정연설까지 총리에게 넘겼다. 역대 대통령들도 쉬쉬했던 당정 갈등이나 선거 개입은 노골적으로 했다. 임기 내내 야당과 갈등했고, 결국 비상계엄이란 극단적 조치를 꺼내 들었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은 개인의 패가망신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축적한 45년 민주주의 체제에 깊은 내상을 남겼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주말 변호인단과 가진 만찬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는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우리 국민이야말로 이제 분열과 혼란을 넘어 치유로 나아가야 한다. 특정인의 성공과 유명세에 취하기보다 그가 디딘 민주적 토대가 얼마나 단단한지 점검해야 한다. 정치는 이견을 다루는 일이다. 싸워서 상대를 꺾어 무너뜨리지 않고 다양한 이해와 의견을 조정하는 일에 매진해 온 정치인에게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6월 대선은 소통과 타협, 대화의 정치를 복원할 첫 번째 시험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