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명명한 4월 2일 미국 ‘해방의 날’은 1945년 종전 후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무역과 다자체제 중심의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종언을 고한 날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던 스무트 홀리 관세율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경제평론가 마틴 울프는 최근 중국을 다녀온 뒤, 중국의 지식인들이 트럼프 미국의 대격변을 보며 60여 년 전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연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기득권 및 관료, 문화 엘리트들에 대한 전쟁이었다면, 트럼프의 ‘해방의 날’은 관세를 무기로 한 ‘무역전쟁’일 뿐 아니라, 글로벌화에서 소외됐던 미국 중서부와 몰락한 중산층이 자유화의 혜택을 누려 온 미 동서부와 엘리트 계층을 상대로 하는 ‘문화전쟁’이자 ‘계급전쟁’에 비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 소외된 계층의 고난을 ‘그들’ 잘못으로 돌렸다면, 트럼프는 당신들 잘못은 없고 ‘글로벌 시스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 그 시스템을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백악관이 발표한 상호관세 팩트 시트에는 일반적 공식 문서에선 보기 힘든 이례적인 문구들이 들어 있다. ‘상호관세는 미국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선출한 큰 이유 중 하나’라는 내용도 있다. 아울러 ‘이는 미국의 황금시대를 여는 황금 룰이며, 타국들이 미국 시장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 아닌 특권’임을 강조한다. 트럼프의 상호관세가 나오게 된 미국 내 정치·경제·사회적 배경과 궁극적인 목표를 짐작하게 한다.
필자는, 2016년 미 대선이 트럼프식 변화가 시작된 원년이라면, 2025년 ‘해방의 날’은 시대적 사조로 체계화된 ‘트럼피즘’이 지향하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가 분명해진 ‘변곡점’으로 본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제조업 재건, 대중 패권 경쟁이라는 ‘뉴노멀’이 트럼프 4년은 물론, 그 후에도 어느 정도의 조정 과정을 거쳐 지속될 것으로 보는 이유다.
구조가 바뀌는 세상에서는 우리도 구조적 변화로 대응해야 한다. 상호관세, 업종별 관세에서 조금이라도 예외를 받거나 세율을 낮추는 협상에 집중하는 것은 단기적인 해결책이다. 결국, 트럼프 4년 동안 세계 경제질서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국가 간 승패는 내부의 구조조정, 체질 개선을 어떻게 이루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키워드는 ‘경쟁력 제고’ ‘인공지능(AI) 전환’ ‘다변화’이다.
해외에서 볼 때 우리 주력 산업의 경쟁력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 다음 정부에서 ‘경쟁력 제고’를 대통령의 어젠다로 삼고 드라이브를 걸어 5년 이내에 하향 추세를 반전시키지 않으면 그 후의 희망은 사라질 것이다. ‘창조적 파괴’를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과감한 규제 완화와 산업정책이 최우선 과제다. 기업들도 이제 수출에만 의존해서는 리스크가 큰 만큼 국내의 생산 기반은 AI 스마트 공장화하고, 해외투자와 현지 생산의 유기적인 병행 체제를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향후 5년간 AI 기술의 진전은 상전벽해일 것이나, 해외에서 객관적으로 본 한국은 아직 AI 분야의 존재감이 없다. AI 기술의 개발이나 비즈니스와 실생활에 응용하는 양 측면 모두 뒤떨어져 있다. 중동의 산유국 아랍에미리트(UAE)는 이미 2017년에 최초로 AI부와 장관직을 만들어 집중적으로 AI에 투자하고 있다. 최근 만난 실리콘밸리의 AI 투자가들은 한국의 제조업 기반이 강한 점을 들어 피지컬 AI 로봇을 한국이 틈새를 찾을 수 있는 유망 분야로 제시했다.
트럼프 4년 동안 많은 국가의 ‘다변화’는 크게 진전될 것이다. 최근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는 미·중을 제외한 제3국, 특히 미들파워 국가들이 연대해 글로벌 경제 시스템을 지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다. 그중 유럽연합(EU) 27개국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12개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거나 협력을 모색하는 방안이 관심을 끈다. 한국이 빠져 있는 것이 아쉽다.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서 트럼프와 중국 대응에 한·일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일치하는 시점에서 CPTPP를 통해 일본과 좀 더 높은 수준의 경제협력을 맺는 것도 고려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