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44) 남아공 케이프타운

 

1652년 네덜란드인 정착뒤

향료 무역 전진기지로 변신

19세기 영국 지배로 바뀌어

 

노벨문학상 수상한 존 쿳시

“제국주의는 연장만을 꿈꿔”

 

백인의 도시·혼혈인 변두리

흑인 거주 시골 판자촌 차별

만델라 당선뒤 흑백연합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서부의 스카이라인. 게티이미지뱅크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서부의 스카이라인. 게티이미지뱅크

“제국의 속마음엔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엔 적들을 쫓아다닌다. (중략)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지배했던 백인들의 잔인한 행위, 불안한 마음을 압축해 보여준다. 배경은 한 제국의 변방 도시, 화자는 이 도시를 통치하는 치안판사다. 소설은 평화로운 이 도시에 야만인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수도에서 비밀경찰이 파견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도시에 들어온 제국의 개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야만인들을 적으로 규정한 후, 그들을 잡아들여 고문한다. 억압과 폭력의 시대를 이어가려 제국주의자들은 낮엔 존재하지 않는 적을 억지로 생산하고, 밤엔 불안과 공포에 짓눌리는 셈이다. 이처럼 야만은 바깥에서 오기보다 내부에서 먼저 생성되어 음모의 불길을 타고 번져간다.

화자는 경찰의 무자비한 작전이 가짜 적을 만들어 제국 내부를 단결시키고 체제를 유지하려는 치졸한 자작극에 불과함을 꿰뚫고 있다. 제국 지배 체제의 한 가지로 야만인 군대란 힘없고 무고한 원주민의 다른 이름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국가 수호자이며 폭동 전문가이고 진실의 신봉자”인 수도 경찰들은 잔인한 작전과 고문을 반복하고, 화자는 무기력하게 이를 방조할 뿐이다.

그 와중에 화자는 고문 후유증 탓에 눈이 먼 야만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는 그녀를 집 안에 들여 매일 밤 상처를 씻어주는 등 온정을 베푼다. 그러나 그로 인해 화자는 적들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채, 파이프를 입에 쑤셔 넣고 목구멍에 소금물을 들이붓는 고문을 당한다. 그 무참한 고통 속에서 화자는 깨닫는다. 야만인 여자에 대한 연민이 무자비한 제국의 폭력을 모르는 체하면서 양심의 가책만 낮추려는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고, 여자는 처음부터 그 행위가 기만적임을 알고 그를 멀리했음을.

제국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야만을 제도화함으로써 소박한 행복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국가 폭력, 야간 통행금지, 이동 제한, 무장 순찰 등으로 약자들의 일상이 붕괴되고 삶 전체가 고통에 처했는데, 체제 혜택을 모두 누리면서 죄책만 낮추려는 건 그 자체로 비양심이다. 쿳시에 따르면, 야만을 생산하는 체제의 변혁에 동참하지 않고 큰 안락 위에 작은 선행을 얹는 건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자신에게 얘기하는 거짓말”, 즉 채찍을 든 당근일 뿐이다.

쿳시가 태어나 자란 도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입법 수도인 케이프타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야만의 증거이면서 가장 눈부신 희망의 상징이다. 이 도시는 수백 년 동안 차별과 저항, 반란과 학살을 반복한 인종주의적 야만의 무대이고, 흑인과 백인의 타협을 통해 평화롭게 이룩한 민주주의적 실천의 현장이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케이프타운 시민들은 피로 얼룩진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청산하고, 인종차별을 철폐한 후 화해와 용서에 바탕을 둔 공존의 정치를 열어젖힘으로써 인류 문명의 성숙성을 보여줬다.

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인 희망봉 북쪽에 있는 인구 약 480만 명의 대도시다.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유럽 정착지가 건설된 ‘모태 도시’이다. 산 정상이 탁자처럼 평평한 테이블마운틴 산이 높이 솟은 가운데, 그 구릉을 따라 건물들이 해안 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1488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이곳에 도착해 ‘폭풍의 곶’이란 이름을 붙였고, 나중에 인도 항로가 열리면서 ‘희망봉’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곳에 사람들이 본격 정착한 것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작은 농장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향료 무역에 나선 선박들을 위해 안정적으로 물과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동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벵골 등에서 노예를 들여와 농장을 경영하면서 내륙으로 마을을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영국계 백인들의 도전과 흑인 원주민들의 저항이라는 이중 장벽과 마주했다.

오랜 투쟁 과정에서 그 후예들은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갖춘 ‘아프리칸스’라는 종족 의식을 발전시켰다. 자신들, 즉 아프리카 태생 백인이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고, 다른 모든 종족보다 우월하다는 투철한 인종주의였다. 이는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점차 강화돼 20세기 들어 거주지 분리와 인종차별을 위한 법적 제도로 이어졌고, 아파르트헤이트의 원천이 됐다.

케이프타운 인근 교외지역의 빈민촌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케이프타운 인근 교외지역의 빈민촌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18세기 중반 유럽에서 7년 전쟁이 벌어질 무렵,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영국과 프랑스 선박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도시 성장이 빨라졌다. 수십 년 동안 영국과 네덜란드(프랑스) 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이어진 끝에 1814년 영국은 이곳을 점령해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은 노예를 해방하고, 의회를 구성했으며, 이곳은 남아프리카 내륙 진출을 위한 관문 도시가 됐다.

케이프타운의 폭발적 성장을 이끈 건 탐욕이었다. 1870년 다이아몬드가, 1886년 금광이 발견되면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865년 인구 4만 명이었던 도시는 20세기 초엔 17만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반짝이는 보물들을 독차지하려고, 1879년 영국과 줄루 왕국, 1899년부터 3년간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추악한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서 남아프리카 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권력을 장악한 소수 백인 정권은 1920년대 이래 인종 분리 정책을 강화했다. 영국과 네덜란드계 백인들로 이루어진 이들은 보어인, 흑인, 유색인(혼혈인), 아시아인 등을 직업, 교육, 주거, 선거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했다. 흑인 등 유색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을 바꿀 수 없었다. 앙드레 브링크는 말했다. “이곳은 백인의 농장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일하는 손으로, 통 속 포도를 밟는 발로, 부러질 때까지 구부러지는 등으로, 숨 막힐 때까지 졸리는 목으로, 배고픔으로 텅 비어가는 배로만 존재한다.”

1950년대에 백인들은 안전 보장을 이유로 흑인들을 척박한 땅으로 내몰았다. 벼락같이 내려진 백인 전용 구역 선포 후, 집은 모두 철거되고 흑인들은 강제로 쫓겨나 이주됐다. ‘보호주의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네이딘 고디머는 백인이 사는 도시, 혼혈인이 사는 변두리 주택가, 흑인이 사는 시골 판자촌으로 분리된 남아공의 실상을 폭로한다. 백인들은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벌이는데, 흑인들은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통행증 없이는 도시 진입이 금지된다. 백인 소유의 농장 땅은 흑인에겐 바닥 없는 늪과 같다. “진흙이 그를 붙들고,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당기고, 당기지만, 저 아래에서 계속 붙들리고 또 붙들린다.” 이러한 죽음의 늪에서 흑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그녀는 만델라와 함께 평생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위해 투쟁했다.

20세기 후반 내내 남아공 정권은 전 세계의 골칫덩이였고, 결국 국제 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받아서 경제 붕괴 위기를 맞이했다. 더욱이 잔혹한 차별에도 시민들은 굴하지 않았다.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중심으로 항의 시위와 무장봉기가 반복됐다. 시인 몽가네 세로테는 말했다. “우린 극심한 인종차별에서 살아남았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 자기 삶을 창조할 힘이 있었음을 뜻한다.”

백인 정권을 이끌던 데클레르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37년간 섬에 가둔 채 강제 노역을 시켰던 만델라를 찾아가서 타협을 시도했다.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법률을 폐지하고, 보편적 참정권과 선거 민주주의를 향한 전환이 시작됐다. 감옥에서 풀려난 만델라는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됐고, 소수 백인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고 흑백 연합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국민 화합을 끌어냈다.

일찍이 남아공 탈식민주의 문학을 개척한 앨런 패튼은 ‘울어라, 사랑하는 나라여’에서 이야기했다. “엄격한 법이 있다. 우리에게 상처가 생기면, 용서하기 전까지는 절대 회복할 수 없다.” 오늘날 케이프타운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남긴 빈부격차, 거주지 분리의 상처에서 빠르게 회복 중이다.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보어 전쟁

19세기 말 남아공에서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1814년 케이프타운 지역이 영국 손에 들어간 후, 네덜란드계 백인들은 1830∼1840년대에 북쪽으로 이동해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세운다. 이 지역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발굴되자, 영국은 두 나라를 침략해 합병한다. 그 와중에 영국군은 약 12만 명의 보어인을 강제로 수용했는데, 식량과 의약품을 보급하지 않아 이 중 약 4분의 1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나치 이전에 최악의 반인도적 참사였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