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물질

나희덕 지음│문학동네

자연을 향한 시인의 관심은 1989년 등단 이래 그친 적이 없다. 등단작 ‘뿌리에게’는 자신을 뚫고 자라나는 뿌리를 향한 흙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은 ‘푸른밤’(1997), ‘귀뚜라미’(1994), ‘어두워진다는 것’(2001)에서도 자연의 생명력을 특유의 서정성으로 표현했다. 많은 문학 독자들이 애송시로 꼽는다.

등단 37년차, 열 번째 시집에서 자연을 향한 시인의 관심은 새롭게 뻗어나간다. 수록시 ‘진딧물의 맛’을 통해 ‘요즘 내가 궁금한 것은/진딧물의 맛’이라고 말한다. 개미와 진딧물을 필요에 의한 이기적 관계로 규정하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인지’ 물으며 자연 속에서 작은 사랑을 발견한다. ‘콘크리트와 보도블록 아래 흙’에서 ‘도로의 균열’을 내며 모두가 잠든 ‘밤’에도 나아가는 ‘풀’(이상 ‘밤과 풀’)을 발견하는 한편 ‘우리는 여섯 번째 멸종의 취약한 목격자들’(‘여섯 번째 멸종’)이라며 공멸을 예감한다.

수록시 ‘플라스틱 산호초’ ‘피와 석유’를 통해 공멸의 원인도 명확히 짚는다. ‘우리는 플라스틱 중독자’라 고백하고 ‘땅속에서 쉬지않고 뽑아올리는 이 죽음의 주스를/한 번도 마시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라며 반성한다. 종말의 모습은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 타인의 죽음으로도 나타난다. 시인은 수록시 ‘샌드위치’에서 제빵공장 노동자의 죽음을 ‘피 묻은 샌드위치’라며 직격하고 ‘존엄한 퇴거’에서는 기초생활 수급자의 죽음을 헤아린다.

시인의 걱정이 결국 포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수록시 ‘시인과 은행’에서는 ‘은행에 저당잡힌 감정과 생각과 시간을 떠올리면서’ 열악한 세상 속 시인의 자리를 고민한다. 이내 ‘광장의 재발견’ 등을 통해 정의로운 움직임을 촉구한다. ‘세계 끝의 버섯’의 저자 애나 로웬하움트 칭, ‘오웰의 장미’의 저자 리베카 솔닛 등을 동지로 호명하기도 한다. 마침내 표제작에 이르면 ‘한편의 시가/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조차 시인은 시를 통해 희망을 그릴 것을 예고한다. 팬데믹의 한복판이었던 2021년 펴낸 전작 ‘가능주의자’(문학동네) 속 표제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불가능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라고 말하던 시인의 몸부림이 계속되는 것이다. 혼돈의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피어나는 관록의 서정이다. 148쪽, 1만2000원.

장상민 기자
장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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