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열 미술평론가와 함께 본… 호암미술관 ‘겸재 정선’ 展
한양 일대 그린 ‘필운대상춘도’
남산·남대문·관악산까지 담아
이맘때의 봄꽃놀이 정취 가득
‘금강전도’ 1년뒤 ‘인왕제색도’
70대에 연이어 명작 두점 완성
“잡스러운 기술로 출세” 눈총에
말년까지 두차례 탄핵 당할 뻔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이 손을 잡고 선보인 전시 ‘겸재 정선’이 열흘 만에 관람객 수 3만 명을 돌파해 화제다. 지난 2일 시작한 전시는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자 조선 최고의 화가 겸재(1676∼1759)의 작품 165점을 출품한 최대 규모 전시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대표작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뿐만 아니라 명승지를 상세하게 담아낸 탁월한 화첩들이 감탄을 자아내고, 정선이 나고 자란 한양 일대의 풍경은 지금과 달라도 애틋하고 친근하다. 지난 9일 최열(사진) 미술평론가와 함께 벚꽃이 피기 시작한 용인 호암미술관을 찾았다. 그림만 봐도 누구나 아는 겸재의 위대함뿐만 아니라, 그림과 그림 사이 숨겨진 그의 삶, 그림 속에 깃든 그의 마음까지 들여다보기 위해서. 최 평론가는 진경산수화와 실경을 비교·연구해 온 미술사학자로 ‘옛 그림으로 본 조선’(이하 혜화1117) ‘∼서울’ ‘∼제주’ 등을 펴내 주목받았다. 아는 겸재, 몰랐던 겸재, 뜻밖의 겸재, 놀라운 겸재…. 다채롭고 무수한 겸재를 만날 시간이다.

◇70대에 그린 인왕제색도·금강전도…대기만성형 화가 = 전시는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호암미술관 소장)와 금강전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출발한다. 이 두 점만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장 입구는 관람객들이 가장 붐비는 곳이다. 두 그림 모두 18세기 중반에 제작됐는데, 추정 연도는 금강전도 1750년, 인왕제색도 1751년으로 이때 겸재의 나이가 이미 70대 중반이었다. 최 평론가는 “전무후무한 작품을 두 해 만에 두 점이나 내놓았으니 ‘기적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하늘이 한국 미술사에 ‘축복’을 내려준 시간”이라고 작품의 의의를 평가했다. 두 작품 앞에 서면 ‘동국백년무차수(東國百年無此手)’라고 한 당시 문인 박사석의 말을 곱씹게 된다. ‘동쪽 나라 100년에 비교할 솜씨가 없다’는 뜻인데, 최 평론가는 “100년 아니라 1000년에도 비교할 대상이 없을 것”이라고 상찬했다.
금강산은 정선이 마지막까지 가장 많이 그린 주제다. ‘금강전도’는 뾰족한 암석이 두드러진 골산(骨山)과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土山)’을 뚜렷하게 대비시켰고, 그 둘레를 구름이 둘러싸고 있어 신성하고 몽환적이다. 우주 어딘가의 또 다른 행성 같다. 요즘으로 치면 드론에서 내려다본 시선이고, 전체적으로는 안정적인 타원형 구도다. 정선은 금강산을 하나의 소우주로 표현해 자신의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를 추구했던 것이 아닐까.
인왕제색도는 전혀 다른 눈높이다. 내려다본 것도 올려다본 것도 아닌, 지금의 3층 높이 건물에서 마주한 듯하다. 봉우리 윗부분을 잘라버려 하늘이 사라진 것이 독특한데, 그 덕에 역동성과 웅장함을 얻었다는 것이 최 평론가의 말이다. 그는 “한자리에서 그린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한 후 기억을 종합해 ‘생각’하며 그렸을 것이다”라고 했다.

◇청와대와 한강 일대…서울의 옛 모습과 정취를 기록 = 가고 싶어도 가볼 수 없는 금강산 그림에도 매료되지만, 장소가 친숙해서 흥미로운 그림들도 있다. 예컨대 지금의 청와대 인근을 그린 ‘취미대’ ‘독락정’ ‘대은암’ 등. 대은암은 청와대 본관 인근이고, 취미대는 개방된 청와대 뒷산(백악산)에 올라서 남산을 바라본 시선이다. 독락정은 백악산 동쪽 산골짜기에 있던 정자로, 지금은 간데없는 그윽한 옛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오는 6월 조기 대선 후, 청와대의 운명을 상상하며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묘미다.
정선은 한양에서 나고 자랐고, 여러 지역에서 현감을 하다가 50대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다.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랐으나, 30대 중반에 그리기 시작해 이름을 떨치고, 관료로서도 승승장구한 자수성가형 화가였다. 말년엔 당상관에까지 올랐는데, 그렇다고 그의 삶이 신선이 노닐 것만 같은 그의 그림 같지만은 않았다. 종로구 필운동 일대의 평화로운 봄날을 그린 ‘필운대상춘도’ 앞에서 최 평론가는 “정선이 여러 차례 탄핵을 당할 뻔했다”고 했다. 재주가 많아 시기도 많았던 걸까. 정선은 50대와 80 무렵 두 번이나 탄핵 상소에 이름을 올린다. 이유는 ‘잡기발신’. ‘잡스러운 기술(그림)’로 출세했다는 비난이다. 모두 ‘기각’됐다.
필운대에서 한양을 조망한 ‘필운대상춘도’는 볼수록 놀랍다. 남산(심지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도 보인다)과 남대문, 도성 일대, 관악산까지 담아낸 희귀한 작품이다.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봄날, 그림 속 손톱만 하게 그려진 선비들처럼 유유자적하고 싶어진다. 진경산수화는 인물을 아주 작게 그려 넣는 것이 특징이다. 최 평론가는 “한국과 중국 등 유가 문명권의 공통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정선의 그림을 보며 더욱 깨우치게 된다”고 했다.

◇30대 겸재 vs 70대 겸재…같고도 다른 금강산 = 정선이 처음 금강산을 여행한 건 36세였고, 마지막은 72세였다. 그는 금강산 그림으로 출셋길에 올랐는데, 말년에 다시 금강산 사생에 도전한다. 정선이 남긴 두 개의 금강산 화첩 ‘신묘년풍악도첩’(1711)과 ‘해악전신첩’(1747)을 비교해 감상하면 그의 삶과 작품이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36년의 차를 두고 완성된 정선의 금강산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전자엔 무명 화가의 열정과 희망이 넘친다. 필법은 날카롭고 묵법은 엄정하다. 후자엔 대가의 달관과 확신이 서려 있다. 본질을 부각하고 나머진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러면서도 세련되고 부드럽다. 최 평론가는 “정선은 나이가 들수록 더 잘 그렸다. 진정한 노력파다”라고 했다.실제로 그는 아주 성실한 화가였다. 정선의 산수화를 30점이나 구입했던 신돈복은 “삼백 년 이래로 그림의 최고라 하니 구하는 자가 삼대밭처럼 무수했다. 그런데도 정선은 응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초췌하고 마른 선비” 정선의 그림값은 = 정선은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정선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작품에 종종 등장할 때가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독서여가도’다. 오른손에 부채를 펴든 선비가 툇마루에 앉아 해당화를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엔 ‘그림 속 그림’을 찾는 묘미가 있다. 책장 문과 부채에 그려진 정선의 그림이 뭔지 맞혀 보는 것도 좋겠다. 정말 정선이 맞나 의심이 든다면, 박사해가 정선에 대해 쓴 글이 있다. “대체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초췌하고 마른 선비가 많다.” 딱 그 모습이다.

정선의 작품은 얼마였을까. 정선과 이웃해 지낸 문인화가 조영석에 따르면, 정선의 그림은 약 3000전. 당시 쌀 한 가마가 50전이었으니, 쌀 60가마의 가치였다. 참고로, 국보와 보물 55점을 포함해 165점이나 내어 준 이번 전시의 관람료는 1만4000원이다.
6월 29일까지지만 예약을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다. 인왕제색도는 5월 초면 수장고로 돌아가야 한다. 이후 해외 전시 출품으로 수년간 국내선 볼 수 없다.
밀려드는 인파를 뚫고 미술관을 나오는데 최 평론가가 “대단하다. 내년이 정선 탄생 350년이 되는 해인데 결국 조영석 예언 그대로 됐다”고 경탄했다. 1759년 84세로 정선이 세상을 떠나자 조영석은 이렇게 증언한다. “임금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를 부르시니, 가마꾼도 그 이름을 알거니와 살아서 일세에 이미 이름이 났었고, 죽어서 백대 이후까지 내려갈 테니 가히 죽어도 썩지 않을 것이다.”
박동미 기자주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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