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수도 서울 도시계획의 근간은 하늘-산-궁궐의 3단계 풍경을 극대화하기 위한 궁궐의 위치와 간선 도로망을 결정한 풍수의 명당 논리다. 풍수사상이 중국에서 기원했지만 이런 도시는 중국의 역대 수도에 존재한 적이 없고 중국 고대의 이상적 수도계획을 담은 ‘주례’의 ‘고공기’에도 없으니, 중국으로부터 배웠거나 모방했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다른 국가나 문명권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니,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창조된 것이다.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도시계획의 근간을 만든 후 ‘고공기’의 도시계획 일부를 받아들인 것이, 종묘는 왼쪽(동)에, 사직단은 오른쪽(서)에 둔다는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원칙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변형을 가했다. 중국의 전형적인 수도에서는 궁궐 앞 직선의 남북축을 중심으로 정확한 좌우 대칭의 배치를 한 반면, 서울에서는 직선의 남북축인 육조거리로부터 멀고 어그러진 좌우 배치다.
흥인지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을 연결하는 동서대로의 진입 지점에서 종묘를 바라보면 하늘-산(보현봉)-종묘(정문)의 3단계 풍경이 선명하다. 사직단의 진입로는 육조거리에서 서쪽으로 형성되었는데, 서쪽으로 가다가 서서북쪽으로 살짝 꺾이는 지점에서 하늘-산(인왕산)-사직단(정문)의 3단계 풍경이 나타난다. 경복궁에 적용된 3단계 풍경을 종묘와 사직단에도 그대로 적용한 것인데, 이것이 좌조우사의 배치가 비대칭으로 된 이유다.
관청을 궁궐 앞쪽에 배치한다는 전조(前朝)의 원칙은 서울의 육조거리에서도 잘 지켜졌다. 하지만 궁궐 뒤쪽에 시장을 배치한다는 후시(後市)의 원칙은 적용되지 않았다. 경복궁의 뒤쪽은 천기(天氣)가 북악산에 내려와 지기(地氣)로 바뀌고 지맥을 타고 경복궁과 이어진다고 여긴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후시의 원칙을 적용해서는 안 되었다. 대신 동서대로와 남북대로의 교차점을 중심으로 시장을 배치하고, 거기에 야간 통행금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각을 설치했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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