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극단 올 첫 연극 ‘코믹’

검은 롱코트 차림에 올백 머리를 하고 북한 사투리를 쓰는 남자 손님이 모자를 사러 왔다. 그는 자신의 원래 머리 사이즈는 55지만 조금 더 큰 60 사이즈로 달라고 한다. 가게 주인은 머리 크기를 숨기고 싶어 하는 그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손님과 말다툼을 벌인다. 이내 모자 가게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이념’이니 ‘협상’이니 하는 거창한 단어가 오간 끝에 손님은 모자를 사지 않겠다며 화를 낸다. 붉은 조명을 활용해 누아르 영화처럼 비장하게 연출한 장면에 오히려 실소가 터져 나온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지난달 28일 개막한 서울시극단의 올해 첫 연극 ‘코믹’의 에피소드 ‘모자 사러 왔습네다’(사진)이다. 어색한 긴장감만큼이나 묵직한 풍자만 있는 게 아니다. 머리에 쓴 안경조차 찾지 못하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 안경 어데 있노’, 담당 부서 업무가 아니라며 걸려 온 전화를 서로에게 돌리는 ‘떠넘기기’ 등 일상에서 겪을 법한 사소한 일들을 위트 있게 녹여 냈다. 프롤로그를 포함해 10개의 에피소드가 짧지만 강렬하게 펼쳐진다. 요즘 시대에 걸맞은 ‘쇼트폼 연극’이라 평할 만하다.

독일의 극작가 카를 발렌틴이 1930년대에 쓴 ‘변두리 극장’의 여러 단편을 재구성했다. 코미디극 ‘스카팽’ ‘휴먼코메디’ 등을 통해 ‘신체극의 대가’로 인정받은 임도완 연출이 각색과 음악까지 맡았다. 임 연출은 “1930년대 작품인 만큼 현대적으로 가져오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며 “시국이 하도 어수선하니 관객들이 보고 마음 편히 웃으면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생생한 팔도 사투리. 전국 각지 사투리는 물론, 옌볜(延邊) 사투리까지 등장한다. 9번째 에피소드 ‘이혼 법정’에 등장하는 양꼬치집 주인은 옌볜 사투리를 팍팍 쓰며 판사에게 대든다. 배우들은 ‘사투리 선생님’까지 모시고 연습을 했다고 밝혔다. 8명의 배우가 100분 동안 퇴장 없이 무대에 오르고 에피소드의 전환도 빠르게 이뤄진다. 풍자극다운 과장된 몸짓 등 슬랩스틱도 두드러진다.

제목 그대로 시종일관 웃음이 나오는 작품은 아니다.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부조리’인 만큼 마냥 웃기기보다는 생각할 지점을 남긴다. 의사와 환자의 역할이 쉼없이 바뀌는 ‘병원이더래요’에서는 상황이 바뀜에 따라 겪을 수 있는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 찾아가 애도하기는커녕 친구에게 빌린 돈 얘기만 늘어놓는 ‘그거시 우정이랑가’에서는 진정한 우정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한다. 배우 김신기는 “웃음은 항상 선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와 닿았다”고 전했다. 공연은 20일까지 계속된다.

김유진 기자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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