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상담소

▶▶ 독자 고민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납골당에 모신 지 한 달째, 전 제가 정말 나쁜 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례식 때 저는 거의 울지도 않았습니다. 울다가 실신한 동생이나 연로하신 아버지를 챙기기에도 정신없었고, 장례를 치르는 것 자체가 너무 바빴기 때문이죠.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지금도 정말 아무 느낌이 없다는 점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오늘도 저는 남편과 아이들 챙기느라 정신없어서 어머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와중에도 나 자신부터 걱정하는 이런 제가 너무 싫습니다.
A : 누군가와 어머니 얘기를 하며 발산해보면 어떨까요
▶▶ 솔루션
굉장히 흔하게 하는 말입니다. 암 투병 끝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장례식도 치르고, 납골당도 다녀왔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엔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많이 자고,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 뿐, 이런 자신이 너무 싫다고. 심지어 어머니를 더 일찍 떠나가게 한 건 혹시 이런 차가운 마음 때문은 아닐까 자책까지 하게 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마음 상태는 사실 아주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애도의 과정입니다. 심리학자 존 볼비는 애도 과정을 네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무감각해지다가 그다음에는 그 사람 생각에 며칠 밤을 새우며 그 사람을 찾아 헤맵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에 만사가 귀찮고, 우울, 불면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야 비로소 슬프지만 함께 있었던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인생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회복하게 됩니다.
첫 번째 단계인 ‘충격과 무감각’은 우리의 뇌와 마음이 일종의 안전장치를 작동시키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는 실감도 안 나고, 정신이 멍한 채로 사람 챙기기에 바쁘다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비로소 마음속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마음으로 떠나보내는 시간이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슬픔은 꼭 눈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잠이 늘고, 멍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아무 일도 하기 싫은 것도 모두 애도의 흔한 모습입니다. 오히려 진짜 위험한 건 이런 상태가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전혀 변화가 없거나, “모든 게 내 잘못이다” “나도 죽고 싶다” “이젠 아무것도 의미 없다”와 같은 병적 애도 반응이 지속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엔 반드시 의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애도란 어쩌면 ‘오래된 스웨터’와도 같습니다. 너무 아끼면 옷장 속에서 잊히고 먼지만 쌓일 뿐입니다. 하지만 자주 입고, 체온을 나누고, 조금씩 해져갈 때 비로소 그 옷은 내 삶의 일부가 됩니다. 사연자에게도 그런 시간이 곧 찾아올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 생각에 목이 메고, 눈물이 터지고,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질지도 모릅니다.
슬픔은 꾹 눌러두고 버틴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꺼내놓아야 조금씩 힘을 잃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게 바로 ‘이야기’입니다.

생전 어머니와 나눴던 일상, 어머니의 말투, 장난들, 웃음, 심지어 미처 표현하지 못한 서운함까지도 누군가와 나누는 것, 그 과정에서 슬픔은 고통이 아닌 추억으로 조금씩 자리를 옮깁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 떠나보냅니다. 머리로 한 번,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권순재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정보이사·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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