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 논설위원

강대국 간 헤게모니 전이(轉移)가 가장 협력적으로 평화롭게 이뤄진 사례로는 20세기 대영제국의 파워가 미국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꼽힌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던 덕분이지만, 영어 사용 민주주의 국가라는 공통점 덕분에 합심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미국 국제정치학자 코리 샤키는 저서 ‘안전한 경로(Safe Passage·2017)’에서 영국에서 미국으로의 헤게모니 전환 과정을 이런 관점에서 분석했다.
영·미의 헤게모니 이동이 협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상 외교 현장에서 그 과정을 겪어야 했던 처칠의 마음까지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처칠과 전쟁(Churchill at War)’ 4부작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이 세계 유일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견디는 처칠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독일의 런던 공습이 본격화한 1940년 말 처칠은 민주주의를 구할 유일한 세력은 미국이라고 판단해 루스벨트에게 지원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두 지도자는 1941년 8월 ‘대서양 회동’ 후 협력 관계를 구축했고, 1943년 1월 카사블랑카에서 만나 전후 처리 원칙을 의논할 정도로 밀착했다.
전쟁사가 앤드루 로버츠는 두 지도자의 관계가 1944년 6월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은 헤게모니가 미국으로 넘어갔음이 확인된 자리였다. 처칠·루스벨트의 관계도 “오래된 부부 같은 상태”로 묘사됐다. 5개월 후 포츠담회담에서 처칠은 옆으로 밀려난 채 미국·소련의 주도를 따라야 했다. 그럼에도 영·미는 협력해 브레턴우즈 체제를 구축, 2차 대전 이후 평화와 번영을 이끌었다.
미·중이 관세 전면전에 돌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당시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미국산 제품 대량 구매 등의 유화책을 펴며 확전을 피했지만, 이번엔 결사항전 태세다. 딥시크 등 첨단기술 굴기에 자신감을 가진 데다 물러설 경우 종신체제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깔린 듯하다. 헤게모니 전이가 평화롭게 이뤄진 영·미와 달리 미·중은 언어·문화·정치체제 등 모든 게 다르다. 그레이엄 앨리슨이 경고한 투키디데스 함정에 제대로 빠져드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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