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석의 푸드로지 - 파이
곡물 반죽한 그릇 모양 크러스트에
식재료들 얹어 굽거나 속채운 요리
국내선 과자 등 디저트 개념이지만
서양은 육류 등 넣어 주식으로 먹어
고대그리스 벽화서도 등장한 음식
중세 십자군에 의해 전세계 전파說
유럽선 ‘라즈베리’ 등 올려 즐기고
미국은 ‘피칸’ 등 견과류 넣고 구워

때 이른 대선 정국이라 그런지 요즘 신문엔 동그란 그래프가 자주 등장한다. 이른바 ‘파이 차트’(pie chart)다. 원의 반지름으로 전체 중 비율을 구분하는 방식인데 누가 얼마나 점유하는지 눈에 쏙쏙 들어온다. (반)지름으로 원의 둘레와 넓이를 계산하는 데 필요한 원주율(圓周率)을 뜻하는 파이(π)는 다른 수학 기호처럼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둘레’를 뜻하는 페리메트로스(περιμετροζ)의 첫 글자를 가져왔다. 그런데 음식 파이(pie)를 여기다 갖다 붙이기도 한다.
지난달 14일은 세계 원주율의 날(pi day)이었다. 원주율이 3.141592… 어쩌고로 시작하는 무한소수인데 마침 3월 14일이라서 그렇다. 이날 원주율 외우기 대회도 여는 등 유네스코 공식 ‘수학의 날’로서 많은 학술 행사도 펼치는데, 파이를 먹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으레 파이 만들기, 먹기, 던지기 등 파이와 관련된 행사를 벌인다.
파이 차트 역시 파이(π)라 하지 않고 파이(pie)라 적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원(圓)과 파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론 파이 중에는 원이 아닌 모양도 많다. 파이는 곡물로 반죽한 크러스트 위에 식재료를 얹어 굽거나 아예 속에 넣어 만든 요리를 말한다.

초코파이나 후렌치파이, 빅파이(사실은 제일 작다) 등이 국내에 알려진 탓에 파이를 과자 종류로 여기는 이들도 많은데 사실은 주식 개념이다. 유럽에선 오랜 세월 동안 식사 메뉴로 먹어온 것이 파이다. 특히 고기를 넣은 파이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벽화 등을 보면 고대 이집트에서도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그때 거기엔 원주율 파이도 함께 있었다)
뭐 곡물 반죽에 고기를 넣거나 올려서 구워내는 방식은 밀가루를 먹는 문화권에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식문화다. 서남아시아에서 시작한 만두와 이탈리아의 피자 역시 어찌 보면 미트파이(mince pie)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음식이다. 반죽에 식재료를 더한 것이 애초 맛을 위해 고안한 것은 아니고, 다른 그릇이나 식기가 필요 없도록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냥 들고 받침까지 먹으면 되니 더없이 편리하다.
현재의 파이와 비슷한 형식은 중세 시대 십자군이 중동으로부터 들여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달콤한 꿀이나 잼을 곁들인 파이는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유럽 각국으로 퍼져 다양한 파이가 생겨났다. 특히 이미 미트파이를 즐겨 먹던 영국에선 기존 파이 형식에 수많은 레시피가 더해졌다. 이른바 ‘파이의 종주국’이 됐다. 그리 자랑할 것 없는 영국의 식문화 중에서 미트파이는 그나마 인정받는 요리였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도 미트파이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선 작중 초반 올리버의 운명을 바꾸는 죽이 유명하지만 이후 런던으로 간 이후엔 미트파이가 더욱 자주 언급된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도 미트파이를 먹는 장면이 서술된다. 미트파이가 19세기 초 영국인들의 일상 식사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근대 영국의 주요 식문화가 됐으니 당연히 ‘대영제국’의 기함(旗艦) 메뉴로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요즘도 호주와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에선 대부분 자국의 요리로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와 함께 미트파이를 내세우고 있다. 가보면 실제로도 미트파이를 많이 먹는다.
미트파이 이외에도 종류가 아주 많다. 핼러윈 데이에 먹는 호박파이, 서유럽에서 디저트나 간식으로 먹는 애플파이, 북유럽의 라즈베리 파이, 미국인들이 대표적 가정식으로 여기며 즐기는 피칸 파이와 호두 파이 등 과일과 견과를 넣은 파이가 있다. 미트파이 중에도 닭고기나 칠면조 등 가금류를 쓰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양고기, 토끼, 캥거루 고기를 저며 넣은 것도 있다. 심지어 생선인 정어리 살을 넣어 먹기도 한다.
치즈케이크로 더 많이 불리는 치즈 파이도 널리 알려진 파이다. 치즈 파이는 크림 파이와 함께 만화영화나 코미디 영화에서 주로 사람 얼굴에 던지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미국 워너 브러더스의 만화영화 ‘톰과 제리’(Tom & Jerry)에서 가끔 고양이가 얼굴을 얻어맞고 치즈 범벅이 되는데 그게 바로 쥐가 던진 치즈 파이다.
치즈 파이처럼 이름은 다르긴 해도 파이로 분류되는 것은 수도 없다. 예를 들어 타르트(tart)는 작은 파이 개념이다. 구성과 형식이 파이의 제조법을 그대로 따른다. 이탈리아의 고기만두 격인 칼초네나 아르헨티나의 엠파나다도 우리가 보기엔 만두 비슷하지만 서양에선 미트파이의 종류로 여긴다. 서양인의 생활 속에서 동양권의 만두나 떡처럼 자주 먹는 음식이다 보니 이처럼 친숙한 음식도 없다.
관용구에도 자주 등장한다. 파이를 나눠 먹는다(이윤을 나누다), 파이를 키운다(시장을 성장시킨다), 파이를 뺏다(고객을 빼앗다) 등 경제학 용어에도 종종 등장한다. 오죽하면 “Easy as a pie(파이 먹기처럼 쉽다)”란 표현도 있다. “Piece of cake(케이크 조각 먹기)”와 같이 영어권에서 ‘식은 죽 먹기’ 정도의 의미로 쓰는 말이다.
그런데 파이 먹기가 그렇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우리말에도 “누워서 떡 먹기”처럼 버거워 보이지만 쉽다고 여기는 속담이 있기에, 그냥 그들에게는 파이 먹는 게 쉽나 보다 하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아무튼 파이는 주식으로도 간식, 후식으로도 널리 먹는 메뉴가 됐다. 국내에도 제과업계에 파이 전문점이 생겨나고 있으며 영국식, 뉴질랜드식, 호주식을 내세우며 미트파이만 파는 가게도 따로 생겨났다.

호두 파이나 치즈 파이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파이 종류는 주로 페이스트리처럼 부드러운 빵 껍질로 싸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드러운 식감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간식이다. 하지만 먹다가 부서지기 쉬워 흘리는 경우가 잦아 필자의 차 안에서는 절대 금지 품목이다.
미국 사회에서 파이는 온정을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솔 푸드(soul food)를 이야기할 때 어머니가 집에서 해준 파이가 빠지지 않는다. 이사를 오면 이사 온 사람이 이웃집에 떡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집에서 직접 만든 파이를 들고 찾아온다고 한다. 파이는 그만큼 미국인의 삶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대중문화 속에 왜 아메리칸 파이라는 포크송과 영화 시리즈가 있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제로섬(zero-sum)의 세상 속 모든 것의 점유를 놓고 다투는 요즘의 세태. 맛있는 파이를 놓고 사이좋게 나눠 먹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서로 불평할 일 없이 그저 쉽게 먹어 치울 수 있는 파이 한 조각씩. 하긴, 파이를 키우면 되니까.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메리지아레 = 크로스티노. 치즈와 새우, 가지, 토마토 등 8가지 토핑을 얹어 오븐에 구워낸 이탈리아식 파이다. ‘피자 파이’와는 다르다. 피자 도와 달리 페이스트리 빵도 바삭하니 끝까지 맛있게 즐길 수 있다. 나무 그늘 아래의 휴식이란 뜻의 메리지아레(meriggiare)는 이탈리안 캐주얼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라자냐, 트리파, 바칼라 등 다양한 메뉴를 와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파리 르 꼬르동 블루 출신 이지민 셰프와 일본 핫토리 요리학교를 나온 임영미 셰프가 메뉴를 구성했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8길 43 2층.
◇웅파이 = 뉴질랜드식 미트파이. 뉴질랜드에서 오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두 자매 셰프가 현지의 미트파이(mince pie)를 그대로 재현해 인기를 모으고 있는 집이다. 소고기를 갈아 특제 소스를 함께 넣은 비프파이와 매콤한 칠리 콘 카르네 맛의 비프칠리파이, 커리 파이 등 정통 고기 파이의 맛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다. 현재 수도권 곳곳에 분점이 있어 어디서나 즐길 수 있다. 서울 마포구 망원로2길 62.
◇엘리스 파이 = 피칸파이와 호두파이. 디저트 파이 전문점이다. 국내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미국식 피칸 파이를 먹을 수 있다. 촘촘하게 박힌 호두 파이도 맛이 좋다. 바삭한 호두 아래로 촉촉하고 녹진한 빵이 받치고 있다. 한입 베어 물면 호두와 빵이 어우러져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입안 가득 채운다. 시그니처인 나비파이와 말굽파이도 인기 아이템이다. 서울 중구 다동길 33.
◇포컬포인트 = 애플파이. 서울역 뒤편에 자리한 모던한 분위기의 파이 전문 카페. 커피, 음료와 함께 다양한 파이 종류를 판다. 달콤한 불고기 맛 서울 소불고기 파이, 제육 맛을 내는 레드 포크파이, 양 라구 파이, 송정떡갈비 파이 등 다양한 창작 미트파이류도 있고 그릴드 콘파이, 충주 사과를 쓴 저당 충주사과파이, 딸기 요거트 파이 등 디저트 파이 종류도 두루 갖췄다. 충주사과파이는 시나몬을 넣은 미국식이다. 서울 용산구 청파로 387.
◇장복진 제빵소 = 초코파이. 오리온에서 나온 정(情)자 쓰인 것이 아니라 수제 초코파이다. 초콜릿 버터를 바른 것이 아니고 초콜릿을 넣고 구워낸 빵 사이에 생 마시멜로가 들어 있다. 부드러운 빵을 씹자면 진한 초콜릿 맛에 달곰하고 촉촉한 마시멜로가 어우러지며 단맛의 조화를 이끌어 낸다. 작은 사이즈라 간식거리로 딱이다. 상호처럼 명장이 이름을 내걸고 직접 만들어 파는 빵집이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동송로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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