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빠르고 넓은 고속도로 뚫리자

구불구불 한계령 길 찾지 않아

 

스마트폰 시대 온라인이 대세

책과 독서도 유튜브 등이 대체

 

모두가 ‘나만의 길’로 차별화

좁은 길이지만 결국 이게 인생

지난주 강원도 속초에 다녀왔다. 매년 책방 식구들과 함께 떠나는 워크숍이었다. 내 머릿속의 속초는 아직도 자동차로 대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인데, 아침 10시에 출발한 우리는 오후 1시도 안 돼 설악산 아래 동네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타니 채 3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산이 많은 강원도에 쭉 뻗은 고속도로를 만들려니 터널의 연속. 길을 달리는 재미는 적었다. 시간 맞춰 서둘러 가는 출장길이 아니라면 풍광 구경도 여행의 중요한 일부이지 않나. 속초로 향하는 마음에 아쉬움이 일면서 10여 년 전 떠났던 이탈리아 여행이 떠올랐다.

몇몇 소도시를 거쳐 마지막에 들른 곳은 볼로냐. 이탈리아의 키친이라고 불릴 만큼 먹을 게 많은 볼로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한 뒤 로마로 돌아와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었다. 로마행 기차표는 일부러 해 질 무렵에 맞춰 끊었다. 등이 높은 의자에 몸을 묻고 열차의 커다란 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탈리아의 투실한 들판 위로 떨어지는 석양에 눈을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은 전혀 석양을 보지 못했다. 날이 흐려서가 아니라, 열차가 내내 땅속으로 달렸기 때문이다. 새로 고속철도가 깔린 걸 생각지 못한 탓이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철도를 땅 밑으로 낸 덕에 열차는 예전보다 훨씬 빠른 2시간여 만에 나를 로마 역에 내려놓았지만, 그 여행엔 노을은커녕 일체의 차창 풍경이 없었다. 얼마나 슬펐던지….

그때를 생각하며 서울로 돌아갈 때는 터널 많은 양양고속도로가 아니라 설악의 영봉들이 동행하는 한계령으로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한계령을 넘으며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을 들으니 비장한 느낌이 밀려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부령이나 한계령을 달려 동해에 닿아 본 경험이 없는 젊은 후배는 한 굽이 돌 때마다 설악의 봉우리들이 번갈아 보이니 탄성을 질렀다. “알프스가 따로 없네요. 막 국뽕이 차올라요.” “하하, 그래? 한계령휴게소에 들러서 엄청난 풍경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가자. 거기를 꼭 보여주고 싶네.”

그런데 웬걸. 예전의 한계령휴게소가 아니었다. 아찔한 고개에 떡 버티고 선 한계령휴게소는 알프스 산장 못지않게 멋졌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가본 그곳은 꽤 쇠락한 모습이었다. 여행객이 별로 없어 가게는 거의 비었고 시설도 꽤 낡았다. 그러고 보니 양양에서 한계령으로 접어들었을 때 이미 느낌이 있었다. 길에 차가 별로 없었다. 길가의 주유소도 폐업 직전처럼 보였다. 빠르고 넓은 고속도로가 뚫리니 차들은 더는 한계령을 찾지 않았다. 경사가 심한 데다 굽이굽이 돌아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는 국도는 효율이 떨어졌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사람들은 죄다 뻥 뚫린 서울양양고속도로로 내달렸고, 앞으로도 사람들은 운전해서 동해안에 갈 때는 고속도로를 탈 것이다. 그날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길’이 되어버린 한계령을 달리면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또 하나 떠올렸다. 내가 일하고 있는 책 동네야말로 그런 길이구나 했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린 후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물건을 사는 일은 온라인이 대세가 되었고, 여가를 보내는 방식도 달라졌다. 책과 독서를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대체하고 기업은 시장점유율(Market Share) 외에 고객의 시간점유율(Time Share)을 중요하게 따진다. 내가 책방을 연 것은 2016년 8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독서 이탈 현상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고 앞으로의 흐름도 빤해 보일 때다. 그런데도 이 일이 하고 싶어 이 동네로 들어와 여태 일하며 보내고 있다. 마치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는 걸 보면서도 국도로 들어선 경우랄까.

좋아서 선택한 일을 왜 도중에 포기하는가 하는 질문이 오래도록 내게 있었다. 물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적고 불안정한 수익이라는 문제가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 평소 우리는 차별화를 외치고 남과 구분되기를 바라지만, 막상 대오에서 떨어져 나와 좁은 길을 가다 보면, 즉 확실하게 차별화된 상태에 놓이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린다. 이게 맞을까, 이대로 계속해도 되는 걸까. 편하고 빠른 ‘고속도로’를 놔두고 나는 왜 불편하고 느린 ‘국도’로 들어섰을까, 나는 왜 남들이 안 하는 걸 하고 있나, 내가 뭐라고 이러고 있나…, 온갖 시끄러운 마음이 올라온다. 나를 흔들어놓는 최초의 바람은 바깥에서 불어오지만 끝내 결국 내 안의 무엇인가가 맞장구치며 공명해 스스로 밑바닥까지 헤집어 놓는다. 사실은 나도 내 선택이 불안했다고.

모두들 ‘나의 인생’을 살고 싶어 하고 마이 웨이를 가겠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이 말은 중요한 한마디를 괄호 속에 품고 있다. ‘무릅쓰고’라는 말. 나의 선택이 좁은 길이라 앞으로 몇 번쯤은 불안하고 흔들리겠지만 나는 ‘무릅쓰’고 그 길을 계속 가 끝내 나의 길로 만들겠다는. 이쯤에서 고전이 된 팝송 ‘마이 웨이(My Way)’의 가사를 다시 살펴본다.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And did it my way.’(모든 일에 정면으로 맞섰고 당당히 버텼죠. 그리고 내 방식대로 했어요) 맞다.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이어져 결국 길이 되고 인생이 되는 거다. 노래 속에 인생이 있었다.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前 제일기획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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