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56) 유사성

 

日단노우라 지역 바다에

사람 얼굴의 게 나타나

해전때 죽은 사무라이들이

게가 됐다는 이야기 전래

‘유사성’이 전설 만든 것

 

과학적 진리는 아니지만

인간 마음 속 깊이 자리

 

르네상스 후 철학자들은

“오류의 원천” 비판도

일본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의 대가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작품. 단노우라 바다에 빠져 죽은 사무라이들이 게로 변했다는 일본 설화를 그렸다.
일본 전통 목판화 ‘우키요에’의 대가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작품. 단노우라 바다에 빠져 죽은 사무라이들이 게로 변했다는 일본 설화를 그렸다.

사람의 얼굴을 가진 게가 있다.

12세기 일본에선 다이라(平) 가문과 미나모토(源) 가문 사이의 권력 싸움이 일어난다. 미나모토 가문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다이라 가문은 멸망하고 겐지(源氏)는 일본의 주인이 되어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세운다. 두 가문의 최후 전투는 시모노세키(下關) 단노우라(壇の浦)에서의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다이라 가문이 세운 천황 안토쿠(安德)뿐 아니라 수많은 가신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전쟁은 끝난다. 두 가문의 전쟁을 노래한 13세기의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는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천황의 애달픈 죽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놀란 얼굴로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게냐?’ 하고 묻자 이위 마님(천황의 할머니)은 어린 주상을 쳐다보며 눈물을 참고서 ‘마마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셨나이까? 전생에 십선의 계행을 하신 공덕으로 현세에 만승천자로 태어나셨으나 악연으로 인해 이제 운이 다하신 거랍니다.… 이 나라는 변방소국이어서 귀찮고 어지러운 일이 많았기에 극락정토라는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려 합니다’ 하고 울며 아뢰었다.… 이위 마님은 바로 주상을 품에 안더니 ‘바다 밑에도 황궁이 있답니다’ 하고 달래면서 천길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다.”(오찬욱 역)

이 ‘헤이케 이야기’는, 또 다른 전쟁 이야기 ‘일리아드’가 맹인 시인 호메로스의 노래를 통해 퍼졌듯, 비파 연주를 하는 맹인 승려(비파법사) 집단의 노래로 일본 전국에 퍼져 나간다. 저 맹인 비파법사와 관련된 일본 설화가 ‘귀 없는 호이치’이다(라프카디오 헌이 채집한 설화집 ‘괴담’(1904)에 수록). 다이라 가문의 죽은 원혼들은 헤이케 이야기를 비파 연주와 함께 읊는 명인인 맹인 승려 호이치에게 매일 이 이야기를 청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원혼들에게 죽을 운명이다. 이를 알게 된 절의 주지 스님이 그의 온몸에 불경을 써넣게 하여 호이치는 귀신의 화를 면하게 된다.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의 영화 ‘괴담’(1964)이 이 설화를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는데, 영화에서 사무라이의 원혼을 피하기 위해 승려의 얼굴 가득 붓으로 불경을 적은 인상적인 장면은 후에 영화 ‘파묘’(2024)에서도 반복된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서 ‘허공을 부유하는 불로 연출된 혼령’은 후에 고전 명작 게임 ‘귀무자’가 그대로 계승한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 ‘괴담’(1964) 포스터.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 ‘괴담’(1964) 포스터.

흥미로운 것은 천황과 다이라 가문의 사무라이들이 몸을 던진 바다에는 특별한 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로 다이라 가문의 이름을 가진 ‘헤이케게’(平家蟹)로서 한국에선 조개치레, 도깨비게 등으로 불린다. 이 게의 등에는 무서운 표정을 한 사무라이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영국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는 1952년에 이 특별한 헤이케게를 ‘인위선택’(artificial selection)의 소산으로 설명했는데, 칼 세이건도 ‘코스모스’(1980) 같은 유명한 과학 서적에서 이 설명을 반복한다. ‘코스모스’의 한 구절이다. “어부들 사이에 구전되는 전설에 따르면 헤이케의 사무라이들은 게가 되어 지금도 일본 내해 단노우라의 바닥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발견되는 게의 등딱지에는 기이한 무늬가 잡혀 있는데 그 무늬는 섬뜩하리만큼 사무라이의 얼굴을 빼 닮았다. 어부들은 이런 게가 잡히면 단노우라 해전의 비극을 기리는 뜻에서 먹지 않고 다시 바다로 놓아준다고 한다.… 어떻게 무사의 얼굴이 게의 등딱지에 새겨질 수 있었을까? 답은 아마도 ‘인간이 게의 등딱지에 그 얼굴을 새겨 놓았다’일 것이다.”(홍승수 역) 헤이케 사무라이들이 몰살된 단노우라 해전 이후 어부들은 사무라이를 닮은 게들을 먹는 것을 꺼린다. 반면 등딱지가 평범한 게들은 모두 식용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 사무라이의 모습을 더 많이 닮은 게들의 생존 확률이 높아졌고, 게들은 점점 등딱지에 사무라이 얼굴을 명확하게 가지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야말로 자연선택이 아니라 인위선택에 의한 진화이다.

그런데 헤이케게에 관한 이 인위선택의 가설은 1993년 마틴(Joel W Martin)이 발표한 논문 ‘사무라이게’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반박된다. 헤이케게가 가진 사무라이 얼굴 같은 등 모양은 껍질 내부에서 근육을 고정하기 위해 그 종(種)에게 필수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 우연적인 장식이 아니라는 점, 이 게는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 서식한다는 점, 화석에서 알 수 있듯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 사무라이 게가 존재했다는 점, 이 게의 최대 크기가 31㎜였기에, 즉 먹을 게 못 되었기에 단노우라 어부들은 그물에 걸린 게들을 그냥 버렸고, 따라서 게들을 관찰하며 사무라이를 닮았는지 아닌지 분류할 일도 없었다는 점 등등.

그렇다면 헤이케게에 관한 인위선택설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인데, 무엇을 근거로 생겨난 것일까? 이 과학적 가설은 놀랍게도 민간설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바다에 빠져 죽은 다이라의 사무라이들이 그들의 얼굴을 등에 새긴 게가 되었다는 전설은 라프카디오 헌이 일본 설화들을 채집한 ‘골동(骨董)’(1902)에도 나오지만,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우키요에(浮世繪) 화가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國芳)는 죽은 사무라이가 헤이케게가 된 전설을 바탕으로 여러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마틴의 논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이 전설이 오래전부터 일본인 정신 세계의 일부를 이루었음을 알려준다.

헤이케게
헤이케게

‘유사성’이 이 전설을 만들어낸 일본인 정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게 등의 무늬와 사무라이의 얼굴 사이의 유사성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양식’과 ‘과학적 진리’가 갈라서는 지점에 서 있다. 전설이나 설화로 풍부하게 채워진 일상적인 삶의 세계를 지키는 외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사성이다. 제주도의 용두암(龍頭岩)이나 우도(牛島)는 바로 지형지물과 동물의 형태 사이의 유사성에서 얻어진 명칭이다. 느려서 얻어진 별명인 ‘거북이’와 같이 짓궂게 지어진 별명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중국 무술 역시 얼마간 그렇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비슷한 시기의 히트작 ‘취권’(1978)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성룡의 초기 명작 ‘사형도수’(1979)는 뱀이나 고양이, 독수리가 공격하는 모습과 유사한 권법을 쓰는 문파들의 이야기다. 영화 ‘똥개’(2003)에서도 잠깐 언급된 ‘당랑권’은 사마귀와 유사한 몸짓을 하는 무술이다. 유사성은 자연이 무술가들의 스승이 되도록 이끈다. 삶은 온통 유사성으로 가득 차 있다. 유사성은 우리가 살아나가는 방식 자체인 것이다.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1966)에서 보여주듯 르네상스 시대엔 이 유사성이 학문적 지식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가령 16세기 독일의 연금술사 크롤리우스는 날씨와 인체의 유사성을 사유했는데, 푸코는 그의 생각을 이렇게 전한다.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면 복부가 부풀어 오르고, 천둥이 치면 방광이 찢어진다. 또한 번개가 번쩍이는 사이에는 안광(眼光)이 끔찍하게 번뜩이고, 비가 쏟아지는 동안에는 입에 거품이 일며, 벼락이 떨어질 때에는 살갗이 정기(精氣)로 인해 파열된다. 그러나 마침내 날씨가 다시 맑게 갤 때면 환자에게 이성이 다시 깃든다.”(이규현 역) 사실 현대인도 유사성에 입각한 이런 식의 생각에 유혹받는다. ‘날씨가 흐리니 마음도 찌푸렸어.’

그러나 유사성은 결코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없다. 르네상스를 마감한 17세기인들,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은 입을 모아 유사성을 오류의 원천으로 고발한다. 가령 베이컨은 ‘신기관’(1620)에서, 자연 안에는 예외와 차이가 가득한데, 사람들은 서로 상관없는 것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유사성을,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유치한 사고방식이라는 죄명을 달아 쫓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유사성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동시에 진리로부터는 밀려난다. 그것은 학문적 진리는 아니지만,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서 인간의 삶 자체를 만들어 왔다. 유사성에 뿌리를 둔 은유나 직유 같은 수사의 역사가 알려주듯.

단노우라 바다에는 게로 변한 사무라이들이 있다. 누구든 이 게를 보고 이 게의 전설을 듣게 되면 원혼의 슬픔에 공감하게 된다. 유사성은 사라진 세계의 사람들을 현세의 사람들과 이어주는 끈이 된다. 세상을 유사하게 보는 정신이 없었다면, 애통한 인간들의 삶은 현세에서 사라지고, 과학이 지키는 앙상한 진리만이 우리 삶에 남겨졌을 것이다. ‘데빌메이크라이’의 단테처럼 죽은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구원해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영화 ‘괴담’

일본의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제작한 공포 영화로, 그리스계 영국인 라프카디오 헌이 집필한 동명의 책을 토대로 한다. ‘귀 없는 호이치’ ‘설녀’ ‘검은 머리’ ‘찻잔’ 4개의 단편적인 이야기로 구성돼 있으며, 1965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이다. 호이치의 얼굴에 반야심경을 써넣는 장면(귀 없는 호이치)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작품에서 오마주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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