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에서는 남경, 서경의 대화궁, 강화도성 등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때마다 아무리 급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더라도 모두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이뤄졌다. 공민왕과 우왕의 고려 말,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천도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고, 이때도 풍수의 명당 논리를 기본 전제로 하였다. 이궁 등의 새로운 궁궐과 그에 준하는 임금 관련 건축 공간의 선택과 건설에도 당연히 풍수의 명당 논리를 따랐다. 이 정도면 고려는 풍수의 나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고 지방도시도 다 그랬을 것 같다.
경상도의 명칭은 경주의 ‘경’자와 상주의 ‘상’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고려 시대 경주와 상주가 경상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컸던 고을이었기 때문인데, 두 지역은 내륙 고을임에도 읍성이 빨리 축조됐다. 경주읍성은 경상도를 포함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1378년에, 상주읍성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381년에 축조됐다. 이때는 여전히 고려 시대였기 때문에, 두 읍성 또한 풍수의 명당 논리에 따라 위치를 잡고 도시를 건설했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경주읍성은 형산강(서)-남천(남)-북천(북) 세 하천이, 상주읍성은 북천(북)-병영천(남·동) 두 하천이 둘러싼 거의 완전 평지의 한가운데에 남북축의 정사각형 모습으로 건설됐고,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남향했던 두 읍성의 동헌 뒤쪽에는 풍수의 명당 형국의 핵심인 주산이 존재하지 않았고, 좌청룡-우백호-안산 또한 전혀 설정할 수 없었다. 풍수 점수를 매긴다면 0점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전라도 명칭의 유래가 된 전주와 나주의 읍성, 충청도 명칭의 유래가 된 충주와 청주의 읍성, 강원도 명칭의 유래가 된 강릉과 원주의 중심지 모두 동헌의 뒤쪽에 주산을 설정할 수 없는 평지에 들어섰다. 풍수 점수를 매기면 모두 0점인데, 이외에도 꽤 많다. 풍수 전문가나 연구자의 눈에는 이런 사실들이 어떻게 비쳤을까? 주목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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