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at - 플라자합의 40년… 마러라고 구상 출현
美 1980년대 쌍둥이 적자 여파
G5 불러모아 ‘달러 약세’ 선언
엔화 50%·마르크화 30% 급등
‘역플라자’에 개도국 금융위기
트럼프, 환율에 방위비도 엮어
개별국가 상대로 ‘맞교환 외교’
韓·中·유럽·베트남까지 확장
각국 대응책 달라 성패 미지수

1985년 9월, 뉴욕 맨해튼 플라자호텔.
미국의 무역적자와 제조업 공동화를 우려하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을 불러모아 ‘달러 약세’를 선언한다. 일명 ‘플라자 합의’다. 달러는 급락했고, 엔화와 마르크화는 급등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현재 ‘플라자 유령’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플로리다 별장 이름을 딴 ‘마러라고 구상’이라는 명칭으로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플라자 합의와 레이거노믹스 = 1981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2차 오일쇼크 등으로 급등한 물가를 잡기 위해 장기간 고금리 정책(달러 강세)을 폈다. 레이건 전 대통령 취임 당시 약 15%였던 미국 물가상승률은 1983년 약 3%로 급감했지만, 미국은 얼마 못 가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가 동시에 발생하는 소위 ‘쌍둥이 적자’ 문제에 직면했다. 달러 강세로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일본과 독일 등의 수입품 소비가 크게 늘어나면서 무역적자도 확대됐다. 1985년 미국의 무역적자 중 일본과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37.2%, 9.1%에 달했다.
엔·마르크화 절상에 대해 처음에 일본과 독일은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은 보복관세를 언급할 정도로 강경했다. 1985년 여름, 미국 상·하원은 자국에 대규모 무역흑자를 내는 국가들의 상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법안을 제출했다.
결국, 일본과 독일 등은 미국의 강경한 요구에 무릎을 꿇었다. G5는 플라자 합의 바로 다음 날인 9월 23일부터 달러화 가치 조정을 위한 시장 개입에 돌입했다. 이후 2년 만에 일본 엔화 가격은 플라자 합의 전과 비교해 무려 50%, 독일 마르크화도 30% 급등했다.
◇일본·독일의 침체, 한국 등 개도국의 부흥 = 달러화 약세로 미국의 경제는 호황기에 들어갔지만, 반대로 일본과 독일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 됐다. 일본 정부는 수출 감소로 성장률이 떨어지자 내수부양을 위해 금리인하와 부동산 대출규제 완화 등 경기부양 대책을 꺼내 들었다. 일본 경제는 회복되는 듯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거품이 끼는 자충수가 됐다. 제조업이 엔고로 경쟁력을 잃었으며, 부동산 및 자산의 거품이 꺼지자 일본은 장기 침체를 겪게 됐다. 1990년 동독과의 재통일로 재건비 부담까지 감내해야 했던 독일 역시 2002년 유로화 통용으로 마르크화가 평가 절하되기 전까지 경제 침체를 겪어야 했다.
반면, 플라자 합의는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에는 발전의 계기가 됐다. 특히, 일본과 수출 경쟁품목이 많았던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의 기회를 맞았다. 엔화의 가치가 상승해 상대적으로 원화 가격이 싸지면서 한국 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당시에 일본의 반도체 덤핑을 억제하는 ‘미·일 반도체협정’(1986년)도 체결됐는데,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누렸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대만, 태국 등도 이때를 역사적인 호황기로 꼽는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의 호황도 오래가진 못했다. 엔·달러 환율이 80엔이 무너지자 1995년 ‘역플라자 합의(달러 강세, 엔화 약세 유도)’가 체결됐다. 이후 태국 밧화부터 투매가 발생해 급락했고 외환 방어에 실패하면서 1997년 7월 이후 태국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연쇄 금융위기에 빠지게 됐다.
◇트럼프의 마러라고 구상 = 트럼프 행정부는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라고 불리는 새로운 국제 통상·환율 질서 재편을 구상 중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리조트이자 정치 상징공간인 ‘마러라고’에서 명칭을 따온 것이다. 마러라고 구상은 미국의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환율·국채·안보를 하나의 협상 프레임으로 엮어 주요국을 개별적으로 압박하는 전략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자 합의가 미국 주도의 다자 공조 형태의 통화정책 조정이었다면, 마러라고 구상은 ‘맞교환식 양자 외교’로, 통상 질서의 룰 자체를 바꾸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포괄적 리밸런싱’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구상이 등장한 배경에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자리한다. 2024년 미국의 상품무역 적자는 1조2117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코로나19 이후 지속된 재정 확대와 고금리 환경이 맞물리며 연방정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30%를 넘어서며 최고치를 경신했다. 미국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은 약화됐고, 트럼프는 이를 ‘경제 주권의 상실’로 규정했다.
지난 2일 트럼프 대통령은 ‘해방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수입품에 최소 10%의 기본관세를 부과하고, 중국·독일·한국 등 무역 흑자국에는 최대 49%에 달하는 ‘상호주의 관세’를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90일간 유예 방침으로 한발 물러섰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 같은 고율 관세를 지렛대 삼아 ‘환율·국채·안보’를 핵심축으로 한 압박협상 구도를 본격화하고 있다.
◇플라자 vs 마러라고, 구조는 닮고 방식은 다르다 = 플라자 합의와 마러라고 구상은 미국의 대외수지 적자와 제조업 침체를 배경으로, 주요국에 통화 절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접근방식은 전혀 다르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이 금리인하와 통화완화 정책을 병행하며 G5 국가와 공동선언을 채택한 ‘공조형 다자협의체’였지만, 마러라고 구상은 고율 관세, 환율 협상, 국채 매입, 방위비 분담 등을 맞교환하는 ‘양자 거래형 압박외교’다. 협정 체결 대신 개별 협상을 통해 조건별 맞춤형 조정을 이끌어내는 전략이다. 협상 대상국 수도 차이가 난다. 1985년엔 일본·독일 정도가 주 타깃이었다면, 지금은 한국·중국·유럽연합(EU)·베트남·대만·멕시코까지 확장됐다.
그러나 무역 흑자국이 많아진 만큼, 마러라고 구상이 플라자 합의처럼 일괄 타결되기는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마러라고 구상의 성패는 결국 미국의 통화·금융 여건과 주요국의 협상 대응에 달려 있다. 일본·한국 등 일부 동맹국과의 환율 협조는 가능성이 있지만, 중국·EU의 반발과 글로벌 고금리 환경은 달러 약세 유도에 제약이 될 수 있다. 마러라고 구상은 합의 없이 현실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실패한 압박 전략으로 남을 수도 있다.
박정경 기자, 신병남 기자주요뉴스
시리즈
이슈NOW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