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 인터뷰 - 정재호 연세대 양자사업단장

 

혁신약물 개발까지 통상 17년

양자컴 활용하면 획기적 단축

 

연세대 내년에 신약 논문낼 것

미국 빅테크 기업이 경쟁상대

 

韓, 양자컴 SW에 초점 맞춰야

활용사례 먼저 만드는게 중요

 

신소재 등 다양한 분야와 협력

글로벌 양자 네트워크 구축 꿈

정재호 연세대 양자사업단장이 지난달 2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 연세사이언스파크 추진본부에서 양자컴퓨터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정재호 연세대 양자사업단장이 지난달 2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 연세사이언스파크 추진본부에서 양자컴퓨터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양자컴퓨터가 미래 산업의 판도를 바꿀 ‘게임체인저’로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 기업이 혁신 기술을 선보이는 비자가전쇼(CES)는 올해 ‘양자기술이 곧 비즈니스’라는 프로그램을 열고 양자컴퓨팅이 물류, 소재, 의료,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가능성을 소개했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등 빅테크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양자컴퓨팅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달 정부가 양자전략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여전히 관심과 투자는 부족하다. 이런 가운데 연세대가 지난해 고성능 양자컴퓨터 ‘IBM 퀀텀 시스템 원’을 도입하고 양자 산업화를 선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연세대는 특히 의학 분야의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연세대 양자사업단을 이끌고 있는 정재호 의과대학 교수를 지난달 24일 신촌캠퍼스에서 만났다.

―양자컴퓨터는 어떻게 계산하길래 연산 속도가 빠른가.

“기존컴퓨터가 한 번에 하나의 연산만 수행할 수 있다면, 양자컴퓨터는 여러 계산을 병렬적으로 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 연산 단위인 큐비트는 0과 1이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큐비트가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는 ‘얽힘’ 현상으로 인해 큐비트가 늘어나면 무한대에 가까운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IBM의 127큐비트 양자컴퓨터를 도입했다. 양자컴퓨터에 주목한 이유가 뭔가.

“인류가 마주한 문제는 대부분 계산을 통해서 탐색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는 당면한 가장 복잡한 난제를 풀 수 있는 도구다. 구글이 지난해 공개한 105큐비트 양자컴퓨터 칩셋 ‘윌로’는 현존하는 가장 빠른 컴퓨터가 10자(10의 24승) 년이 걸리는 계산을 5분 만에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양자컴퓨터 도입으로 인류 지성이 쌓아온 최고봉에 있는 계산력을 활용해 세상에 기여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어떤 분야와 협력을 진행 중인가.

“신소재, 통신, 광학, 금융 등 다양한 산업군의 기업이 양자컴퓨터 사용을 신청했지만 바이오 기업이 특히 적극적이다. 암젠 등 글로벌 제약기업을 상대로 기술이전에 성공한 리가켐바이오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연세대 양자사업단 역시 신약 개발 분야에서 성과가 빠르게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업단의 중심에 있는 정 교수는 외과 의사이자 암 연구 권위자다.

신약 개발의 첫 단계는 단백질 구조 규명이다. 단백질이 인체에서 특정한 구조를 형성하는 것을 ‘단백질 접힘’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질병은 잘못 접힌 단백질 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신약은 인체 내에서 표적으로 설정한 단백질의 특정 부위와 결합해 구조를 변경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접힘 구조 연구가 필수적이다. 문제는 어떤 단백질 구조는 수십 년간 연구해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이런 연구 과정 때문에 혁신적인 항암 신약의 가격은 수십, 수백억 원에 이른다.

―암 연구를 하다가 양자컴퓨터 활용에 눈을 돌린 계기가 있었나.

“양자컴퓨터를 활용하면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양자역학적 원리를 이용해서 작동하는 양자컴퓨터라면 이전에 깨달을 수 없었던 암세포의 취약성을, 지금까지 몰랐던 숨겨진 특성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단백질 접힘은 결국 전자의 움직임과 밀도를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전자의 거동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 학문이 양자역학이다.”

―신약 개발에 양자컴퓨터를 사용하면 어떤 이점이 있나.

“일반컴퓨터가 레고 조각을 하나씩 맞춰보는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반면, 양자컴퓨터는 한 번에 수십억 개의 레고 조각을 맞춰보며 답을 찾는다.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 신약 개발에 통상적으로 17년이 걸리고 5조 원이 드는데, 양자컴퓨터를 활용하면 개발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양자기술이 앞선 선진국에는 개발 사례가 있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바이오 스타트업 인실리코메디신은 캐나다 토론토대와 협업해 항암제 후보 물질을 발견했다고 지난 1월 밝혔다. 췌장암, 폐암, 대장암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케이라스(KRAS)’ 단백질을 표적으로 하는 신약이다. 토론토대는 16큐비트 양자컴퓨터를 활용했다.”

―이 연구의 의의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만 내고 검증까지 가진 않았다. 그런데 토론토대는 신약 설계뿐 아니라 실제로 합성한 후 암세포 사멸 효능 검증까지 마쳤다. 신약 연구·개발(R&D)의 기본 사이클인 설계, 합성, 검증을 전부 돌린 첫 사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마일스톤 페이퍼가 될 것이다.”

―연세대는 언제쯤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내년에 양자컴퓨터를 활용한 신약 관련 논문이 나오고, 후년에는 논문을 넘어서 신약 물질을 발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27큐비트 양자컴퓨터를 활용한 세계 최초의 논문이 된다. 의료 연구의 특성상 임상시험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쉬운 케이스부터 접근하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줄기세포형 암과 같은 난치암 치료를 궁극적인 목표로 두고 있다.”

―경쟁상대는 어디로 보고 있나.

“구글, 엔비디아 같은 미국 빅테크 기업이다.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신약 개발 모델을 출시하고 네이처 등에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올해 초 양자컴퓨터 상용화에 30년이 걸릴 거라던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달 보스턴에 가속 양자 연구센터를 설치해 하버드대 등과 협업하겠다고 선언했다. AI 다음에는 양자컴퓨터를 활용할 것이다.”

정부가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으로 양자산업 육성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격차가 크다. 양자전략위원회 출범식에서 시연회를 진행한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의 양자컴퓨터는 20큐비트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양자기술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까.

“양자컴퓨터 개발보다는 활용 쪽에 초점을 둬야 한다. 지금 활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는데 안 하고 기다릴 일은 없다. 꼭 국산이 아니면 쓰지 않는 세상은 아니지 않나. 연세대 양자사업단에 소속된 교수진도 공통적으로 양자정보과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우리나라가 국산 컴퓨터를 만들어서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 된 것이 아니라 컴퓨터를 활용하면서 반도체와 메모리를 만들게 됐다. 그런 것처럼 활용 예시를 먼저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양자컴퓨터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한국이 뒤처져 있지만,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적으로 시작점이 비슷하다. 국가 차원에서 양자 알고리즘 연구센터를 만들어 활용 사례가 나오기 시작하면 게임의 룰이 우리나라 쪽으로 오게 만들 수 있다.”

―신약 외에 어떤 진전이 있었나.

“연세대는 신소재 개발, 반도체 전력효율 설계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양자컴퓨터에 관심 있는 연구진과 협력하고 있다. 현재 10개의 워킹그룹을 운영 중이며, 성과가 우수한 그룹과는 장기적으로 협업할 방침이다. 나아가 글로벌 양자 네트워크 구축을 꿈꾸고 있다. 이달 초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IBM 양자컴퓨터를 활용한 공동연구에 나서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캐나다 워털루대,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 등 선도 기술을 갖춘 대학과 협력 관계도 만들 계획이다.”

―양자 문해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얘기인가.

“연세대는 산업계 인력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양자 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양자 연구력을 높일 인재를 육성하려면 중·고등학생 때부터 양자컴퓨팅 원리를 이해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연세대는 올해 2학기부터 양자정보과학대학원을 통해 석·박사 과정을 운영한다. 내년이나 후년에는 학부 단위에서도 양자 관련 학과를 설립할 예정이다.”

명함 절반 크기의 양자프로세서… 1초에 10의 36승 번 연산 동시 수행

■ 연세대 도입 ‘퀀텀 시스템 원’

연세대가 도입한 IBM의 ‘퀀텀 시스템 원’(사진)은 인천 연수구 연세대 국제캠퍼스 한가운데 위치한 연세퀀텀컴플렉스에 설치돼 있다. 연세퀀텀컴플렉스 개소식을 앞둔 지난 2월 27일 언론에 공개된 ‘퀀텀 시스템 원’은 두꺼운 유리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양자컴퓨터가 작동할 수 있는 초전도 상태를 조성하기 위해 절대 영도로 불리는 영하 273.15도의 극저온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양자컴퓨터 본체에 해당하는 양자프로세서(QPU)는 명함 절반 크기로 매우 작지만, 성인 남성보다 큰 원통에 싸여 있었다. 내부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QPU 칩마다 전선이 연결돼 있어 마치 ‘샹들리에’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정재호 연세대 양자사업단장은 설명했다.

초저온 환경을 만드는 데는 상당량의 전력이 필요하다. 대략 30㎿의 전력이 투입된다. 한 가정에서 쓰는 전력량이 평균 1.7㎾인 점에 비춰보면, 3만 가구 이상이 동시에 쓸 수 있는 전력량이다. 여기에 필요한 전기요금만 1년에 1억 원가량이다.

IBM의 ‘퀀텀 시스템 원’은 현존하는 슈퍼컴퓨터보다 연산 속도가 빠르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는 미국 캘리포니아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에 있는 ‘엘 캐피탄’이다. 이 컴퓨터는 1초에 174.2경(京·10의 16승) 번의 계산을 할 수 있다. IBM의 양자컴퓨터는 약 170간(澗·10의 36승) 번 연산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엘 캐피탄보다 1해(垓·10의 20승) 배 빠른 계산이 가능하다.

양자컴퓨터로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암호체계를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공개 키 암호(RSA) 방식으로 된 암호를 풀려면 기존컴퓨터는 10의 290승 초가 걸린다. 1년이 3150만 초(10의 7승 초)라는 점에 비춰보면 해독하는 데 10의 282승 초가 걸리는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양자컴퓨터를 활용하면 10시간 만에 풀 수 있다. 양자컴퓨터가 정보·보안 분야를 바꿀 패권 기술로 주목받는 이유다.

김지현 기자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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