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시간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김민욱 옮김│에이도스

 

인간 ‘협력 양육’ 통해서 진화

아버지도 돌봄에 반드시 필요

 

20세기엔 애착이론 등 근거해

양육본능을 女전유물로 설명

최근 연구 “돌봄, 경험서 발현”

 

남성도 아이와 상호작용하면

공감능력·보호본능 등 활성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바깥에 있었다. 출근길에 나서는 뒷모습, 늦은 귀가, 아이를 안아보지 못한 채 끝나는 하루. 아버지는 집 밖의 사람, 육아의 ‘보조자’였다. 시대가 흐르며 상황은 조금 달라졌다. 맞벌이 부부가 늘고 공동육아가 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부성애’의 자리가 생겨났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육아휴직 제도 등 사회적 조건도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인간의 적응력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영장류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는 ‘아버지의 시간’에서 이 흐름이 단지 제도와 환경 변화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남성이 아이를 돌보는 일은 인간 본성에 가까운 행동이며,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는 그 본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모성애의 신화는 뿌리가 깊다. 그 근원에는 영장류 연구에서 비롯된 애착 이론과 진화론이 있다. 기존의 진화론은 인간 수컷을 경쟁과 지배의 존재로 설명해왔다. 저자 역시 과거 ‘어머니의 탄생’을 통해 여성의 돌봄본능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조명한 바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포유류 수컷은 새끼를 돌보지 않으며, 일부 영장류는 오히려 새끼를 공격하는 ‘영아살해’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5400여 종의 포유류 가운데 수컷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종은 고작 5%에 불과하다. 인간도 오랫동안 이 통계의 예외가 아닌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허디는 인간이 ‘협력 양육’을 통해 진화해온 종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인간의 아이는 성장이 느리고, 돌봄에 요구되는 손이 많이 필요하다. 어미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다. 생존을 위해 여러 양육자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구조가 필요했고, 그 안에는 분명히 수컷, 즉 아버지도 있었다.

그럼에도 20세기 생물심리학은 오랫동안 남성의 양육본능을 간과해왔다. 20세기 후반, 애착이론과 생물심리학은 임신과 출산, 수유를 중심으로 여성의 육아본능을 조명했다. 보호와 양육을 촉진하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은 출산을 경험한 여성의 전유물처럼 설명됐다. 모든 어린 유인원이 어미와 계속 붙어 있고자 하는 습성을 바탕으로 한 ‘애착이론’은 돌봄은 ‘모성’임을 강화했고, 모성애를 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돌봄 능력이 성별이 아닌 경험의 축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옥시토신은 모두에게 평등한 호르몬이다. 남성 역시 포옹, 접촉, 반복된 상호작용을 통해 옥시토신을 분비한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남성의 뇌에서는 전전두엽의 활동이 증가한다. 이 영역은 계획과 판단, 감정 조절과 공감 능력을 담당한다. 반복되는 육아 경험은 보호본능을 점차 활성화시키고,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감정이 뇌 깊숙이 자리 잡게 한다. 다만 남성에게 존재하는 보호본능의 스위치를 켜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아이가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을 목격해야 하고 돌봄의 필요성을 인지해야 그 능력은 자연스럽게 깨어난다.

허디는 이 책에서 과거의 아버지들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다. 그간 돌봄에서 남성이 부재했던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기회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방점이 있다. 찰스 다윈이 “남성의 타고난 불행한 본능”이라 부른 지위에 대한 집착과 경쟁적 충동은 사회의 요구였고 남성을 본능에서 멀어지게 했다. 곁에 머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아버지 됨’은 미뤄진 감각이 되었다.

시대는 변했고 이제 아버지의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툭하면 짜증을 내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방문을 닫는 자녀를 바라보며 스스로 돌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핑계는 이제 접어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부족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었을 테니 말이다. 542쪽, 2만6000원.

신재우 기자
신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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