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미 소설가
음대 가라는 지인 충동질에 솔깃
몇 번 실패 뒤 문예창작과로 선회
대학 졸업 뒤 13년 만에 대학원
학위 받고 10년 동안 강단에 서
누구나 타인의 가슴에 불 질러
좋은 결과 나온다면 또 지를 것
스토리텔링 강의를 들을 때 ‘한 줄 로그라인 쓰기’ 연습을 열심히 했다. 장편소설을 한 줄 로그라인으로 압축하는 건 쉽지 않다. 네 줄 로그라인 요약도 마찬가지다. 요즘 상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그동안 살아온 날을 A4 두 장으로 정리하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한 줄 로그라인으로 고통받았던지라 A4 두 장은 은혜의 강물이 아닐 수 없었다.
상담 과제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만든 내 인생의 한 줄 로그라인은 ‘된맛을 못 본 삶’이었다. 된맛을 못 봐서인지 내 소설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는 ‘너무 착하다’로 요약된다. 스트레스 지수가 매우 낮은 집안에서 자라,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어서일까.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하는 질문에는 ‘남의 가슴에 불 지르는 삶을 살고 싶다’는 선명한 답변을 해왔다. ‘이러이러한 거 좋더라’ ‘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너랑 비슷하더라’ 뭐 이런 식으로 말을 시작해 가슴을 두드리는 것이다. 모티베이터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만, 참견꾼으로 눈총받을지도 모를 일이건만.
불을 질러서 결과가 좋으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다. 오래전 울산에서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했는데 어느 날 후배 둘이 피아노를 배우러 왔다. 살 만한 집 딸들이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 대신 취미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대기업 생산 공장이 우뚝우뚝 솟아 있을 뿐 단과대학 하나, 전문대학 하나밖에 없던 시절의 일이다. 그조차 공과 계통이어서 여자들이 진학할 만한 학과가 딱히 없었다. 매일 피아노를 치러 오는 두 동생에게 대학에 가라고 하자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기 힘들다”며 난색을 표했다. “통학하면 되잖아”라는 나름의 해법을 내놓자 둘이 부산에 있는 전문대학에 들어갔다. 후일 “언니 덕분에 공부했다”며 고마워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두 사람이 내 가슴에 지른 불로 인해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음악 관련 모임에서 만난 문 선생이라는 분이 “내가 미혼이면 음대에 가겠다”며 만날 때마다 대학에 가라고 충동질을 했다. 어느 순간 불이 붙었고 대구까지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하지만 첫해 실기시험에서 실수한 게 트라우마가 되어 두 번째 세 번째도 떨어졌고, 나의 진짜 재능이 뭔지 따져보다가 문예창작학과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원 진학은 한 통의 전화에서 비롯되었다. 술에 취한 후배가 새벽에 전화해 “나 대학원 다니는데 여학생들 꿈이 다 프리랜서래. 근데 교수님들은 프리랜서를 몰라. 그러니 프리랜서인 누나가 대학원 졸업하고 가르쳐야지”라고 채근했다. 아침까지 ‘대학원’이라는 단어가 뱅뱅 돌아 대학 졸업한 지 13년 만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학위 받고 10년 동안 대학 강단에 섰는데, 후배의 바람과 달리 ‘소설창작’을 주로 가르쳤다. 다행히 ‘미디어 글쓰기’를 통해 프리랜서의 삶을 웬만큼 전한 듯하다.

대학을 졸업할 때는 소설만 출간할 줄 알았다. 그런데 2008년 출판사의 의뢰로 ‘+1%로 승부하라’를 발간했고, ‘프리랜서처럼 일하라’ ‘대한민국 최고들은 왜 잘하는 것에 미쳤을까’로 이어졌다. 대놓고 동기부여를 하는 내용이어서 그다지 힘들진 않았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남의 가슴에 불을 지르면서 사는 듯하다. 내가 해보니 좋아서, 다른 사람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부지런히 불씨를 옮긴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의 가슴을 함부로 두드리면 안 된다는 자각을 강하게 한 일이 발생했다. 사진을 잘 찍는 후배에게 “포토에세이가 인기 있으니 글솜씨를 조금만 길러서 책을 내보라”며 글과 사진에 능한 몇몇 작가 얘기를 했다. 그러자 “왜 저한테 강요하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뭔가를 성취해야만 한다는 선배 세대의 기준을 제게 적용하지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막 붙이려던 불에 물 한 바가지가 확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그 충격파를 전했더니 “간도 크다. 어디 MZ세대한테 함부로 충고질이냐” “라떼(나 때는 말이야) 하지 말란 말이야. 걔들이 훨씬 똑똑해” “꼰대 소리 듣고 싶냐”며 나를 타박했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또 다른 후배에게 나의 대학원 입성기를 들려주며 “갈 수 있으면 가라. 나중에 강의할 기회가 올 수도 있다”며 불을 질렀다. 얼마 후 그 후배가 “선배 말 듣고 지금 대학원 다니고 있어요”라고 말해 계속 동기부여 할 용기를 냈다.
벚꽃이 마지막 꽃잎을 흩날리던 얼마 전, 동네 주민인 MZ세대 시나리오 작가와 운치 있는 커피집에서 만났다. 챗GPT와 클로드 비교에다 원작료만 받고 사장(死藏)된 우리들의 작품에 대한 애도, 그나마 호응이 있다는 동시대 작품까지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고질병이 도져 “내가 40대로 돌아간다면 곧바로 입금되는 일을 제쳐두고, 굶을 각오로 창작에 몰두하겠다”며 열을 토했다. 뒤늦게 정신차리고 자제하려는데 후배가 “요즘 고민하는 일에 선배가 해답을 주셨어요. 시나리오 작업이 바로바로 결과가 안 나와 고민했는데 결심했어요. 열심히 해보기로”라고 말했다.
후배의 손을 잡고 “집중적으로 해봐. 반드시 결과가 나올 거야”라며 활활 부채질을 했다. 아무래도 남의 가슴에 불 지르는 일을 계속하게 될 듯하다. 누군가가 나를 부추긴다면 늦었다 생각 말고 신나게 달릴 결심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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