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벨상 거쳐… 상용화 속도내는 크리스퍼 기술

 

박테리아 면역전략에서 착안

DNA 조각 잘라내 보관하고

표적 유전자 식별 교정·치료

 

세계 첫 선천성 흑내장 임상

매머드 등 멸종동물 복원 시도

말라리아 퇴치 프로젝트 추진

 

이전 기술들보다 비용 낮아져

간단한 장비로도 설계하지만

비슷한 개체 오인 가능성도

2012년 6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생명과학계를 뒤흔든 논문이 발표됐다. 세포 유전자를 정밀 교정할 수 있는 차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이 개발됐다는 것이다.

박테리아의 면역체계에서 영감을 얻은 ‘CRISPR-Cas9’(크리스퍼) 기술은 세상에 알려진 지 20년은 지난 유전자 편집 기술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효율도 낮고 정교하지 못했던 기존의 유전자 교정 방식은 보다 효율적이고 더 정밀해졌다.

유전자 가위는 의학·바이오·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꿈의 기술인 것처럼 쓰이지만, 막상 이 가위가 무엇을 어떤 원리로 어떻게 잘라내는지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전자 가위는 정말 가위처럼 생겼을까. 세포를 어떻게 교정하는 걸까. 노벨화학상을 거쳐 실용화의 길을 걷고 있는 3세대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 기술을 통해 알아본다.

◇박테리아 면역 전략에서 찾아내 =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종 간의 싸움은 약 30억 년간 이어진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전쟁이다.

박테리아는 바이러스의 천적으로, 바이러스가 내부에 침입했을 때를 대비해 바이러스의 DNA 염기서열 일부를 잘라서 보관한다. 이후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바이러스의 DNA 서열과 대조해 같은 바이러스일 경우 효소 단백질을 이용해 잘라내는 식이다. 바이러스는 이에 들키지 않기 위해 DNA 서열 중 일부를 바꿔 변이종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대응한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박테리아의 면역 전략에서 착안했다. CRISPR는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의 약자로, 박테리아 등이 바이러스의 DNA를 기억하는 반복 염기서열을 뜻한다. 박테리아가 침입 바이러스의 DNA를 기억하고 잘라내는 시스템에서 착안, 특정 DNA 염기서열을 정확히 찾아내 자르고 다시 붙이거나 교체하는 유전자 가위를 고안한 것이다. 실제로 가위처럼 생긴 것은 아니지만, 세포 속 유전자의 특정 부분만을 원하는 대로 자르고 편집한다는 점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래픽=권호영 기자
그래픽=권호영 기자

◇몽타주 보고 수색해 절단한다 =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표적 유전자를 찾아내기 위한 ‘가이드 RNA(리보핵산)’와 실제로 잘라내는 역할을 맡는 ‘캐스9(Cas9)’ 단백질이다. 앞에 언급했듯 박테리아는 침입한 바이러스 유전자의 일부를 잘라 보관한다.

이렇게 보관하는 DNA 조각을 ‘스페이서’라고 부르는데, 가이드 RNA의 끝에 길쭉하게 이어져 있다. 마치 과거 전과자의 몽타주를 그려 보관하는 것과 같다. 만약 새로운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새로운 스페이서가 맨 끝에 추가된다. 가이드 RNA는 가지고 있는 스페이서를 통해 바이러스의 유전자와 대조해, 잘라낼 유전자를 식별하고 붙잡는다. 이후 캐스9 단백질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절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이 가이드 RNA의 스페이서를 인위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특정 세포에 크리스퍼 기술을 적용했을 때 가이드 RNA가 붙잡고 캐스9 단백질이 잘라낼 표적 DNA를 지정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만의 고유한 유전정보 DNA를 가지고 있다. DNA 염기서열은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사이토신(C)이라는 유기화합물이 A-T, C-G로 결합된 배열 형태로 구성된다. 예컨대 어떤 유전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고 그 유전병을 유발하는 DNA 서열을 알고 있다면, 그 서열에 맞춰 스페이서를 설계해 유전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잘라낸 유전자는 세포의 자연 복구 과정을 활용하거나, 원하는 유전자를 삽입해 교정을 유도할 수 있다.

◇단순해서 좋지만…장점과 한계 = 크리스퍼 이전에도 유전자 편집 기술은 존재했다. 이전의 징크핑거 뉴클레이즈(ZFN), 탈렌(TALEN) 등이다. 그러나 이들 기술에 비해 크리스퍼는 비용은 낮고 효율은 높아졌으며, 표적 정확도 역시 크게 개선된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두 기술과 비교해 복잡한 단백질 구조가 없고,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DNA 절단에 사용되는 단백질 캐스9 역시 기존에 쓰였던 ‘Fokl’보다 깊게 자를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렇다 보니 기존엔 복잡한 장비를 갖춘 숙련된 과학자가 필요했지만, 이젠 간단한 실험 장비만으로도 실험실 수준에서 고효율 유전자 편집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작동 구조가 단순하다는 점은 오발사고의 가능성으로도 이어진다. 단순한 구조라 세포 내에 전달되기 쉽고 정밀성과 효율성도 개선됐지만, 가이드 RNA에 탑재된 스페이서가 표적 DNA와 매우 비슷한 다른 DNA를 붙잡는 상황이 왔을 때 절단을 막을 방법이 없다. 비표적 유전자 변형(오프 타깃)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원래 기대했던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표적 DNA와 다른 유전자가 편집돼 예상치 못한 유전자 변형이 발생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희귀 유전병 치료부터 불임모기까지 = 크리스퍼 기술은 의학, 농업, 산업 전반에서 현실적인 응용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는 희귀 유전질환 치료다. 2023년 미국과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승인된 크리스퍼 기반 치료제 ‘카스게비’가 대표적이다. 이는 겸상적혈구빈혈과 베타지중해빈혈 환자의 줄기세포를 채취해 유전자를 편집한 뒤 다시 주입하는 방식으로, 기존 치료법으로는 접근이 어려웠던 병을 사실상 완치 수준까지 이끌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천적 희귀망막질환인 레베르선천성흑내장(LCA10) 치료를 위한 세계 최초 체내 직접 편집 임상시험도 미국에서 진행됐다. 2020년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연구진이 LCA10 환자들의 눈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직접 주입한 것이다. 망막의 광수용체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실명하게 되는 이 병은 아직까지 치료법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멸종동물 복원과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유전자 편집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유전자 편집 모기를 방사해 말라리아 전파를 차단하려는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통해 암컷 모기의 유전자를 변형시켜 불임으로 만들고 이를 방사하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는 매머드 유전자를 코끼리에 삽입해 생태복원형 종 복원을 시도 중이다.

◇기술 진보에 따라 윤리 문제도 = 기술의 급진적 진보만큼이나 윤리적 논란도 커지고 있다. 가장 첨예한 쟁점은 인간 배아 편집이다. 생식세포에 대한 유전자 편집은 후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는 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2018년 중국의 허젠쿠이 박사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통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걸리지 않는 세계 최초의 ‘유전자 편집 아기’를 탄생시켰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허젠쿠이 박사는 이후 실형을 선고받고 2023년 출소하기도 했다.

“치료제 기술 특허 침해”… 韓, 美기업 소송 걸기도

세계 최초로 CRISPR-Cas9(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활용한 유전자 교정 치료제 ‘카스게비’가 소송에 걸렸다. 크리스퍼 기술에 관한 원천 특허를 가진 국내 업체가 카스게비의 개발사 등에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국내 유전자 편집 기술 기업 툴젠은 ‘카스게비’의 개발사 버텍스와 그 상업적 파트너인 론자, 로슬린CT 등을 상대로 영국 고등법원에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28일 밝혔다. 툴젠은 지난해 10월 크리스퍼 단백질-핵산복합체(RNP)에 관한 원천 특허를 유럽과 일본에서 등록한 바 있는데, 버텍스가 카스게비를 개발·제조하는 과정에서 특허 기술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카스게비는 겸상적혈구빈혈과 베타지중해빈혈 치료제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반 세계 최초의 유전자 교정 치료제로 알려져 있다. 버텍스와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동개발해 2023년 11월 영국에서 최초로 시판 허가를 받았다. 툴젠이 보유한 특허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에서 유전자 절단을 맡은 Cas9 단백질을 형태 그대로 세포에 전달하는 단백질-핵산복합체 기술에 관한 것으로, 툴젠의 창업자인 김진수 박사가 2013년 8월 관련 논문을 발표하며 공개됐다. 한편 김 박사는 지난 2010∼2014년 기초과학연구원(IBS)에 재직하면서 관련 기술을 개발했지만, 발명 신고를 하지 않고 총 3건의 기술을 툴젠 명의로 이전해 지난 2022년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의 선고유예를 받기도 했다.

구혁 기자
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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