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36) 왕의 인성과 사생활 - 태조 (下)

 

큰소들이 싸우는 도중 들어가

두손으로 나누어 붙잡아 멈춰

 

부하 뒤에서 지시하는게 아닌

항상 자신이 선봉에 서서 싸워

 

200m밖 과녁에도 ‘백발백중’

활로 적장 셋 죽여 승리하기도

 

위화도 회군으로 국가건설 불구

장남은 인연끊고 형은 음독자살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타고난 근력, 용맹스러운 담력

부하들이 이성계를 믿고 따른 것은 단순히 그의 포용력에 힘입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포용력 뒤에는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이성계의 타고난 힘과 용맹이었다.

이성계는 힘이 장사였고, 담력도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동각잡기’는 다음 이야기를 통해 이를 확인해 준다.

함흥에서 큰 소가 서로 싸우는데, 여러 사람이 소싸움을 말리려고 혹은 옷을 벗어 던지고, 혹은 불을 붙여서 던졌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태조가 두 손으로 두 소를 나누어 붙드니, 소가 싸우지 못하였다.

두 마리의 소가 미친 듯이 싸우는데, 그 속에 뛰어든다는 것은 웬만한 담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소 한 마리만 날뛰어도 웬만한 장정 십여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멈출 수 있을까 말까 한데, 두 마리의 소가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데 홀로 그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두 마리 소를 양손으로 하나씩 붙잡고 싸움을 멈추게 했다면 담력은 물론 힘도 대단했다는 뜻이다.

이성계의 담력은 이 소 이야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야말로 전쟁의 화신이라고 할 정도로 출전하는 전투마다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맹장이었다. 말 그대로 백전백승의 전쟁영웅이었는데, 그가 그렇듯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탁월한 담력 덕분이었다. 이성계는 어떤 상대를 만나도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고, 적병이 아무리 많아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 빼어난 활 솜씨로 신궁의 마력을 발휘하다

하지만 아무리 담력이 좋은 장수도 용병술과 무술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 오히려 지나친 담력은 만용이 되어 패배로 직결되기 십상이다. 이성계는 담력과 함께 용병술이 탁월했는데, 그 용병술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항상 자신이 선봉에 서서 싸운다는 점이었다. 이성계는 어떤 싸움에서도 뒤에서 부하들을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자신이 선봉에 섰고, 선봉으로 진격하면 반드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성계의 승리 비결은 바로 그의 뛰어난 궁술이었다.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난 궁술 실력을 드러냈는데, 실록의 다음 이야기는 이성계의 궁술 실력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찬성사 황상이 원나라에 벼슬하여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순제가 친히 그 팔을 당겨서 이를 관찰할 정도였다. 태조가 동렬들을 모아 덕암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50보(약 200m) 밖에 설치했는데도 태조는 쏠 때마다 다 맞히었다. 해가 이미 정오가 되어 황상이 오니, 여러 재상들이 태조에게 황상과 더불어 쏘기를 청하였다. 무릇 수백 번 쏘았는데 황상은 연달아 50번을 맞힌 후에도 혹은 맞히기도 하고 혹은 맞히지 못하기도 했으나, 태조는 한 번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공민왕이 이를 듣고 말했다.

“이성계는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다.”

또 일찍이 내부의 은으로 만든 거울 10개를 내어 80보(약 110m) 밖에 두고, 공경에게 명하여 이를 쏘게 하되, 맞힌 사람에게는 이 거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태조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왕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태조는 항상 겸손으로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고자 아니하여, 매양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다만 그 상대자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겨우 상대자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이고, 이기고 지고 한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비록 구경하기를 원하여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살 한 개만 더 맞히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이성계의 뛰어난 궁술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기록 말고도 숱하게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왜구의 소년 장수 아기바투를 물리치는 장면과 나하추와의 전투에서 적장 셋을 활로 죽여 승리를 거머쥐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성계는 이 뛰어난 궁술 덕에 전쟁 영웅이 되고, 전쟁 영웅의 명성으로 다시 조선을 건국했으니, 신궁의 마력에 힘입어 조선의 국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위화도회군 이후 벌어진 불행한 가정사

이성계는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에 힘입어 중앙 정계로 진출한 후, 1388년에는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해 요동 정벌을 주창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킨다. 이후 이성계는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여 세력을 확대, 역성혁명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하여 이성계 집안 내부에서 심한 갈등이 벌어진다. 이성계의 장남 방우가 위화도회군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아버지를 성토했던 것이다. 방우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자, 벼슬을 버리고 철원의 보개산으로 은거하여 집안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위화도회군 당시 35세였던 방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삼십 대에 이미 예의판서와 밀직부사 벼슬에 오른 촉망받는 인재였다. 이성계도 그런 장남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정작 위화도회군을 두고는 첨예하게 대립했던 모양이다.

방우는 4년 동안 철원의 보개산에서 은거하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황해도 해주로 거처를 옮겨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서너 달 지내다가 다시 고향인 함흥으로 들어갔다. 이후, 방우는 술에 절어 지냈고, 급기야 술병이 화근이 되어 1393년 12월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위화도회군과 조선 건국은 이성계에게 조정의 요직과 조선의 개국이라는 선물을 안겼지만, 가장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장남을 잃는 고통을 안겨다주기도 했던 것이다.

집안에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반대한 인물은 방우 말고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성계가 따르고 섬기던 이복형 이원계도 회군을 불충으로 규정한 인물이다. 이원계는 고려 왕조에서 문과와 무과에 모두 급제한 인물로 왜구와 홍건적 침입 시에 숱한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또한 요동 정벌에도 참전하여 이성계 휘하에서 조전 원수로 있었다. 그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려 할 때 반대했으며, 회군 이후 최영과 우왕이 내쫓기자, 네 명의 아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다.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이성계)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여라.”

그는 이 말을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에 함경도 화주에서 음독자살한 것으로 전한다.

이렇듯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통해 권력은 잡았지만, 집안에서는 장남이 인연을 끊고, 형이 음독자살하는 불행한 일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작가

■ 용어설명 - 요동 정벌(遼東 征伐)

1388년(우왕 12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고려가 요동을 경략(經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우왕이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정벌 계획을 알렸을 때 이성계는 반대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묵살하고 출병을 강행했다. 이후 위화도회군으로 이어져 고려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려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통해 나라를 재건하려던 최영을 대표로 하는 보수 세력(권문세족, 문벌귀족, 불교)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신진 세력(신흥 무인, 신진사대부, 유교)의 충돌이 빚은 사건이었다.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