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지난 2004년 제17대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불법 대선자금 수수 문제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던 한나라당은 이런 사과를 반복해서 했다. 만일 그때 이런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면, 한나라당은 제18대 총선에서도 결코 회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25일, 국민의힘의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은 계엄 사태와 탄핵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윤 원장의 사과는, 국민이 현재 윤석열 전 대통령과 보수에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대변했다는 차원에서 적절한 사과였다. 이 연설이 국민의힘 지도부와 교감 속에서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당 핵심 인사 중 최초로 공개 사과를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이런 사과가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는 점, 그리고 아직도 국민의힘 대선 경선 과정에서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가 갈라져 대립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국민의힘 주요 인사가 윤 원장처럼 계엄·탄핵 사태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대선 경선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2차·3차 컷오프에서는 당심이 50% 반영되는데, 후보들로서는 계엄·탄핵에 대해 ‘일반적 시각’과 다른 견해를 가진 당원들의 표심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경선용 전략에만 매몰된다면, 향후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다. 사과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인데, 적절한 시점을 계속 놓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타이밍을 놓친 뒤의 사과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갤럽의 정례 여론조사(4월 8∼10일, 전국 18세 이상 1005명 대상 전화 면접 조사. 표본오차 95%에 신뢰 수준 ±3.1%p,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중도층의 80%가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잘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사과가 늦어질수록 중도층의 지지를 얻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임을 보여준다. 동시에 사과가 지연될수록, 더불어민주당이 구축한 ‘내란 옹호 세력’ 대 ‘민주주의 수호 세력’이라는 구도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국민의힘 내부의 일부 강경파가 자신들의 입장을 국민에게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문제다. 이는 결국 유권자를 ‘계몽’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데, 본래 ‘계몽’은 보수의 방식이 아니라 과거 운동권이 주로 활용했던 수단이다. 그런데도 보수라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보수의 가치와 개념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계엄과 그로 인한 탄핵 사태는 보수의 가치와 전혀 무관한 행위임을 국민의힘은 명확히 해야 한다. 윤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보수의 핵심 가치를 내세워 자신의 계엄 선포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득력도 없다. 보수의 본질적 가치는 법치의 수호에 있는데, 계엄령 선포로 인해 오히려 법의 안정성이 매우 심하게 침해됐음을 고려하면, 계엄 선포를 옹호하는 것은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제 국민의힘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회복해야 한다. 법치를 훼손한 부분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하고, 단기적인 경선 전략보다 보수의 장기적 미래를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을 보여줘야 할 때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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